남편과 레고

몇 주 전에 동네를 지나다 우연히 에스테이트 세일(Estate Sale)을 하는 집에 들렀다. 에스테이트 세일은 집에서 필요없는 잡동사니 물건을 파는 거라지 세일과는 달리 집주인이 사망하거나 멀리 이사를 가는 등의 이유로 집의 가재도구 거의 대부분을 파는 세일을 말한다. 이 집의 경우는 집주인 부부가 호주로 이민을 가기 위해 살림살이를 거의 다 내다팔고 있었다.

 대충 스윽 둘러보다가 집 한 켠에 쌓여있는 장난감들 가운데 레고가 가득 든 상자를 발견했다. 5살짜리 둘째 딸이 레고를 좋아해 안 그래도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려고   자그마한 레고 상자를 사긴 했는데, 생각보다 좀 비쌌다. 그런데 이 레고는 적어도 1000 조각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주인과 흥정을 시작했다. 이런 곳에서 흥정을 하려면 심리전이 중요하다. 먼저 절대로 물건이 마음에 든다는 티를 내면 안 된다. 주인은 물건을 빨리 팔아치우기 위해 애가 타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터무니 없이 낮은 가격에도 마음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집은 3일짜리 세일의 첫날이었고, 세일을 시작한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인의 태도에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먼저 주인에게 가격을 물었다. 주인은 가격을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주인은 심리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내 표정을 살피더니 10달러를 불렀다. 10달러면 더 이상의 흥정이 필요 없었다. 10달러에 한 봉지 가득 레고를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없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욕조 안에 물을 받아놓고 클로락스를 풀어 레고를 빡빡 씻었다.

 남편은 옆에서 레고 잘 샀다고 난리였다. 그리고 잘 말린 레고를 박스에 넣고 크리스마스를 기다렸다.
 드디어 크리스마스가 왔다. 예상대로 아이들은 산더미처럼 박스 안에 가득 든 레고를 보고 뛸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두 딸과 아빠는 레고를 방바닥에 풀어놓고 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아이들은 각기 다른 장난감들을 찾아서 놀기 시작했는데, 남편은 아직까지도 레고 상자 앞에 들러붙어 있었다. 처음에는 트랙터를 하나 만들었다. 꽤 견고하게 잘 만든 트랙터였음을 인정한다. 중고 레고이다 보니 매뉴얼이나 샘플 작품 사진도 없었는데, 상상력만으로 트랙터를 시작으로 탱크, 비행기, 소방차, 잠수함 등을 연달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밥 먹을 시간이 되었는데도 달그락 달그락 레고 상자 앞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하루 종일 일하나 시키면 그거 후딱 해치우고 또 레고한테 가 있고, 또 일 하나 하고 와서 레고랑 놀고 있다. 한마디로 남편은 ‘크리스마스를 레고와 함께’였다.
 아빠가 레고 삼매경에 푹 빠져있으니 아이들도 아빠 옆에서 레고하고 논다. 나는 완전 소외된 계층이다. 콩알만한 레고가 뭐가 그리 재밌는지 모르겠다.
 다음날도 애들하고 자전거를 타고 놀이터 순례를 하고 와서는 레고를 한다. 아빠가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작품들은 아이들이 가지고 놀다가 금새 망가뜨리곤 하지만, 남편은 끈기있게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그런데 그런 남편의 모습을 보니 가끔은 그렇게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도 모두 어린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각박한 세상에서 성인으로 살아가면서, 그 순수하고 순박했던 어린 시절의 마음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지…  장난감 하나, 과자 한 봉지에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행복해했던 그때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하얀 종이처럼 순수했던 어린 시절, 그 추억 속의 우리 모습이 분명 아직 우리 마음 속 어디엔가 자리잡고 있을 텐데… 아스라한 기억 속에 잠자고 있을 내 동심도 깨우고 싶다. 가끔은 그 시절로 돌아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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