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어머니는 남편이 간 이식을 받던 날도 하루종일 불공을 올렸다. 엄마는 사위가 간경화 진단을 받고 난 이후 지난 5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도했다. 가끔 남편의 성공적인 수술은 엄마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난 세월 엄마의 정성은 대단했다.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이 보험으로 커버되지 않아 가격이 너무 비싸지자, 엄마는 3년간 매달 소포로 약을 부쳐주었다. 한번은 간에 다슬기가 좋다는 말을 듣고 가공하지 않는 다슬기를 아이스박스에 담아서 속달로 미국으로 보냈는데, 주말이 끼는 바람에 다슬기가 다 폐사해, 이를 보관하고 있던 우체국에서 냄새 때문에 난리가 났던 일도 있었다. 간 치료를 위해 수지침과 뜸, 홍삼, 간 재생 대체식품 등등 엄마가 사위를 위해 보내준 품목들은 일일이 나열하기 조차도 힘들 정도다. 그중 엄마의 마음이 가장 으뜸이었을 것이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힘들고 지칠 때는 항상 ‘엄마’라는 말이 습관처럼 나온다. 나의 생활습관을 닮은 탓인지 둘째 아이도 ‘엄마’를 이유없이 찾곤 한다. "왜 불러?" 라고 물어보면 “그냥, 어디 있는지 확인하려고” 라면서 실없이 웃는다.

    큰 아이를 낳았을 때 한국에 있는 친정 엄마가 딸의 몸조리를 위해 미국까지 오셔서 고생하고 가신 일도 5월 어버이날이 될 때마다 떠오르곤 한다. 건강하지 못했던 첫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에서 첫 주를 보냈고, 다음 한 달 동안은 아동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다. 나는 수술을 한 탓에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었고 산후 우울증까지 겹쳐 기본적인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최악의 상태였다. 남편은 새벽 일찍부터 일을 나가야 했기 때문에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던 갓난쟁이 손주를 돌보는 일은 고스란히 친정 엄마의 몫이 됐다. 한국에서 막 도착한 엄마가 어떻게 말도 통하지 않는 미국병원에서 아기를 간호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역시 엄마는 달랐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간호사를 불러서 손짓발짓을 통해 거침없이 의사소통을 했다. 물이 필요하면 물컵을 보여줬고, 기저귀가 필요하면 기저귀를, 우유가 필요하면 우유병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미국에 처음 와서 영어발음이 이상하게 들릴까봐, 문법이 틀릴까봐 걱정하며 말 한마디 하는 것도 망설이던 우리와는 확실히 달랐다. 단어와 문법을 정확하게 구사하지 못해도 의사와 간호사들이 엄마를 이해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석달을 보내고 공항으로 가는 동안 엄마는 필자의 손을 꼬옥 잡으면서 “너라면 잘 키울 수 있을 거다”라는 말을 되풀이 하셨다. 공항에서 엄마는 울고 서있는 나를 보면서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던지 발길을 돌려 다시 한번 나를 안아주고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후 엄마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아이들의 옷과 양말, 내의, 때밀이 수건, 행주, 프라이팬, 사위를 위한 홍삼정들을 바리바리 싸서 보내주셨다.  대학 다닐 때도 그랬다. 한 달에 한 번씩은 기숙사에 와서 청소며 빨래며, 철마다 이불도 바꿔 주었다. 한 번은 내가 가지고 있던 셔츠 17장을 모두 꺼내 다림질을 해놓고 가신 일도 있다. 기숙사를 나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 생활을 하는 동안 대여섯번 정도 이사를 했다. 그때마다 엄마가 가장 힘이 들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오가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올 때마다 어찌나 일을 많이 하고 내려가시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필자는 못된 딸이 확실하다. 서울 딸네집에 오면 맛있는 것도 먹고, 구경도 다녀야 하는데 매번 침대 옮기고, 책상 바꾸고, 빨래하면서 가정부 노릇을 자청했다. 어제 한국에 있는 언니한테서 카톡이 왔다. 엄마가 배추 김치며 깍두기, 깻잎무침, 시금치, 산나물 무침 등을 해가지고 왔단다. 전날 자정까지 열심히 씻고 다듬고 무쳐서 가지고 왔다면서 카톡창에는 함박 웃음이 가득했다. 그리고 엄마는 평생 박봉의 공무원 아내였지만 정말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도 같다고 했다.

    아버지의 출근시간은 항상 아침 6시50분이었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아침을 준비했고, 6시가 되면 아버지는 아침 식사를 모두 마쳤다. 우리 4형제는 아침 6시30분에 일어나 대충 씻고, 일렬로 문 앞에 서서 출근하는 아버지께 “안녕히 다녀 오세요”하고 인사했다. 아버지의 퇴근 시간은 저녁 6시였다. 그때도 일렬로 문 앞에 서서 “안녕히 다녀오셨어요”라며 인사를 했다. 아버지는 한 달에 한번 정도 부대 회식하는 날을 제외하고는 항상 6시에 정시 퇴근을 했다. 그래서 우리 4형제는 늘 동그란 밥상에 아버지와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는데, 아버지의 숟가락 속도에 따라 우리의 저녁 식사 시간이 결정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식사를 다 할 때까지 거의 앉은 적이 없었다. 식은 국을 한번 더 데워 오거나, 부족한 반찬을 챙기거나, 물을 준비하는 등 종종 걸음으로 아버지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주방과 밥상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어릴 적 필자에게 아버지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종가집의 가부장적 장손의 모습이었고, 어머니는 영락없는 종가집의 맏며느리였다.

    엄마는 필자가 대학에 들어가서 맞은 첫 여름방학 때 유럽 배낭여행을 가라면서 2백만원을 건네주셨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었다. 공무원의 박봉을 쪼개어 4형제를 대학, 대학원까지 보내면서 생활비도 빠듯했을 텐데 2백만원이라는 거금을 모아 내게 건넨 어머니의 뜻은 “당신같이 살지 말라”는 것이었다. 평생을 자식과 남편에게 헌신했던 어머니는 필자만큼은 커리어 우먼으로 당당하게 살길 원했다. 엄마는 스무살에 시집와서 별난 시부모님을 모시고 깐깐한 남편의 비위를 맞추며 살았다. 더구나 연년생으로 4남매를 낳아 키우고, 오빠와 필자, 동생이 재수까지 하는 바람에 엄마는 아빠 도시락을 포함해 8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도시락 10개를 싸야 했다. 이처럼 엄마의 일상은 오롯이 가족에 매여 있었다. 우리는 엄마의 그런 삶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자신과 같은 삶이 자식들의 대까지 이어지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다음주에는 어버이날이 있다. 이제 나도 어엿한 두 아이의 엄마이기에 내 아이들에게 카네이션을 살짝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 엄마가 했던 것처럼 용감하고 무조건적이면서 강인한 엄마가 되는 것에는 자신이 없다. 20대의 풋풋한 시간, 30대의 아름다운 여인의 시간, 40대의 여유로운 시간을 포기하면서 평생을 가족에게 헌신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필자는 가끔 ‘나는 엄마처럼 살지 말아야지. 좀 더 당당하고 멋지게 나를 위해 살아야지’라고 생각했었지만, 엄마가 된 필자가 스스로를 돌아보니 어느샌가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여인의 아름다움을 넘어서 감동을 지닌 이 세상의 어머니, 언제 불러도 가슴찡한 그리운 이름이다. 자식은 어머니를 때로는 투정의 대상으로, 때로는 무시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감히 생각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와 상관없이 끝없이 사랑을 베푸는 우리의 어머니, 당신의 한없이 넓고 깊은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무례함을 용서하시길. 그리고 이제부터는 여자가 아닌 ‘어머니’의 이름으로 살 수 있는 것에 감사하려 한다.

    어머니는 60세가 되는 해에 수지침 요법사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가족 몰래 부산에서 혼자 버스를 타고 서울로 와서 시험을 치렀다고 한다.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 궁금할 정도로 수험서에는 어려운 한자가 가득했다. 어머니는 1년 정도를 준비했다고. 그는 벌써 15년째 시 문화센터에서 수지침 강사로 활동하면서 봉사활동도 틈틈히 하고 있다. 그의 쉼없는 인생에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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