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 현장 가세한 대선주자들

         서로 너무 다른 3·1절이었다. 여야 대선주자들의 대부분은“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헌재의 탄핵심판에 대해 어떤 결정을 하든 승복하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3·1절 서울 광화문광장과 서울광장에서 100만 명 이상이 대치한 탄핵 찬반 집회에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포함해 상당수 주자가 참석했다. 국민 통합을 이뤄내야 할 대선주자들이 각자의 진영으로 나뉘어 분열의 현장에 서 있었다. 강신구 아주대(정치학) 교수는 “헌재 결정이 불과 열흘 남짓 남은 상황에서 대선주자들이 자기 지지층만 찾아가 앉아 있는 모습은 표 계산만 앞세운 것이란 지적을 받을 수 있다”며 “두 동강 난 나라를 통합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재인 전 대표는 지난해 11월 3차 촛불집회부터 1일 열린 18차까지, 이재명 성남시장은 18차례 촛불집회에 한 차례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문 전 대표는 이날 오후 독립운동가 후손인 김시진씨를 찾아 “청산 못한 친일세력이 독재세력으로 이어지고 민주공화국을 숙주 삼아 역사를 지배하려는 야욕까지 부리고 있다”며 현 정부를 친일세력에 빗대 적폐 청산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3·1 만세 시위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려는 것이었고, 촛불집회는 무너진 나라를 다시 일으키자는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나라다운 나라라면 공동체를 배반하고 억압한 세력을 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1운동을 촛불집회와 동일시한 발언이었다. 문 전 대표는 페이스북에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서양 격언을 인용하며 “저와 우리 당은 국민과 함께 촛불을 밝히면서 끝까지 진실 규명과 적폐 청산을 해내겠다”고 강조했다. 이재명 시장은 더 강한 톤의 메시지를 내놓았다. 그는 3·1절 메시지에서 태극기집회를 겨냥, “촛불민심을 꺾기 위한 시도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자유당 시절 만연했던 ‘백색테러’가 다시 부활하고 있다”며 “촛불 시민과 함께해 온 이재명은 끝까지 촛불혁명 완수를 위해 매진하겠다”고 말했다. 여당 대선주자인 김문수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은 태극기집회 연단에 올라 “태극기를 든 국민들과 함께 위법한 탄핵, 위헌적 탄핵에 대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했다. 그는 “국회는 2000년 역사에 역적으로 기록될 것”이라며 “헌재가 촛불이 겁나서 만약 (대통령을) 탄핵한다면 헌재와 헌법재판관들을 탄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인제 전 자유한국당 의원도 이날 태극기집회에 참석해 “탄핵 불가”를 외쳤다. 반면 안희정 충남지사,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 남경필 경기지사 등 4명은 통합과 화합을 이야기하며 집회에 나가지 않았다. 안철수 전 대표는 이날 3·1절 메시지에서 “둘로 갈린 3·1절을 보면서 위대한 대한민국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대통합의 시대가 열리길 기원한다”고 밝혔다. 유승민 의원도 “지금이야말로 무너진 사회공동체를 복원하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는 노력에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게 3·1운동 정신의 올바른 계승”이라고 말했다. 남 지사는 “국민이 바라는 것은 갈등과 대립이 아니라 안정과 화합이며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기초는 협치와 연정”이라고 주장했다.

탄핵정국‘헌법재판소’는 어떤 기관인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그 향방

        최근 탄핵정국을 맞아 모든 국민의 눈과 귀가 헌법재판소(헌재)의 탄핵심판에 쏠려 있다. 이정미 재판소장 대행이 어떤 발언을 했고, 주심 재판관이 대리인들에게 어떤 주문을 했는지, 증인 심문과정에서 어떤 재판관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많은 국민들은 알고 있다. 3.1절을 맞아 광화문 촛불 집회와 대한문 태극기 집회 사이의 장외 대결 못지 않게 재판소 법정 안에서도 치열한 법리 공박과 이념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헌재는 기각·인용 여부를 놓고 재판관들이 ‘장고’를 거듭하고 있다. 대통령 탄핵심판은 헌법재판소의 역할 중 하나다.
◆ 탄생 배경
헌법재판소는 지난 1948년 제헌헌법 때부터 존재했다. 제헌헌법을 보면 헌법위원회를 두고 위헌 법률심판을 담당하게 했고, 탄핵심판은 별도의 탄핵재판소를 두어 처리하도록 했다. 이 조항을 따라 1950년 2월 21일에는 헌법위원회법과 탄핵재판소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초기 헌법위원회는 부통령을 위원장으로 하고 대법관 5인과 국회의원 5인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초기 헌법위원회는 10년간 겨우 6건의 위헌법률심판사건을 처리하는데 그칠 정도로 활동이 미미했다. 그 이후 헌법위원회는 3차 개헌을 거쳐 헌법재판소로 전환된다. 1960년 개정된 헌법은 헌법위원회를 없애고 헌법재판소 제도를 도입한다. 개정 헌법에 따라 1961년 4월 17일 헌법재판소법이 제정됐다. 새로운 헌법재판소는 위헌법률심판, 권한쟁의심판, 정당해산심판, 탄핵재판, 선거소송심판 등을 총괄해 담당하는 현재의 헌법재판소와 역할이 매우 비슷하다. 9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되고, 재판관의 임기는 6년으로 정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구성되기도 전 5.16 군사 쿠테타가 일어난 탓에 빛을 보지 못했다. 헌법재판소는 7차 개정 헌법인 유신헌법에 헌법위원회로 다시 등장한다. 유신헌법은 대법원이 법률 위헌여부 심사를 할 수 없게 하는 대신 헌법위원회를 두고 위헌법률심판, 탄핵심판, 정당해산심판을 맡게 했다. 헌법위원회도 9명 위원 체제였다. 하지만 헌법위원회도 제 역할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지방법원이나 고등법원이 어떤 법률이 헌법에 위반된다고 판단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하더라도 대법원이 필요없다고 결정하면 헌법위원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하지 않을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이다.
◆ 지난 1987년 9차 개정헌법이 나온 후
 ‘헌재’ 정착

헌법재판소가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은 현행 헌법인 1987년 9차 개정헌법이 나온 후 부터다. 헌법위원회나 대법원에 헌법재판을 맡기는 것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는데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오자 헌법기관으로서의 헌법재판소를 설치하고 ▶위헌법률심판 ▶탄핵심판 ▶정당해산심판 ▶권한쟁의심판 ▶헌법소원심판 등을 맡도록 했다. 특히 헌법소원심판이 생긴 것은 이 때가 처음다. 헌법 제107조를 보면 규범통제 관할을 헌법재판소와 법원으로 이원화하고 있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서로 다른 헌법해석을 내놓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실제 명령, 규칙 등이 헌법소원의 대상이 되는 지 여부 등을 놓고 양 기관 간의 관할권 분쟁이 초래되기도 한다. 또 헌법재판관의 자격을 법관으로 제한한 것에 대해 다양성과 철학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과정에서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임기에 대한 문제점이 드러나기도 했다. 박한철 전 헌재소장(1월 31일)과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3월 13일)의 퇴임 일정이 탄핵심판과 겹치면서 재판관 공백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자칫 탄핵심판이 길어져 이 권한대행까지 퇴임한다면 7인 재판관 체제에서 탄핵심판을 해야 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게 될 지도 모른다. 이에 따라 최근 헌법 개정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새로운 헌법에서 헌법재판소의 역할과 기능이 어떻게 개선될 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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