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한국에 다녀왔습니다. 조카 결혼식도 있고, 제가 개발한 교재의 출판문제도 알아보고, 몇 년 동안 뵙지 못한 부모님과 형제들도 그리워서 잠시 들렀었습니다. 30여년 만에 처음 만난 친구와 추억을 안주로 차리고, 취하지도 않는 소주를 여러 병이나 권커니 받거니 비웠습니다. 그래도 꼭 한 가지 해야할 일은 서점에서 영어교재와 참고서를 훑어보는 일이었습니다. 혹시나 그동안 내가 해 온 일을 무색케하는 새로운 교재나 참고서가 있을까 하는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예전과 같이 들러보았습니다. 사실 걱정될 것은 전혀 아닌데, 혹시나 선수를 빼앗길 것같은 옹졸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서점에 들려 영어교재 관련 분야의 서적들을 훑어보았습니다. 각종 영어참고서도 훑어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자녀들의 영어교육 관련도서를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없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였습니다. 영어는 없고 영어책만 있었습니다. 어린이들이 영어를 배울려고 해도 영어가 없기 때문에 배울 수 없는 현실을 확인하고 나왔습니다. 성인들을 위한 영어교재 역시 아주 빈약하였습니다. 영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영어는 없는데 영어라고 우기는 책들만 꽤 쌓여 있었습니다. 결국 한국의 영어교육에는 영어가 쏙 빠져있는 것입니다.
정부주도의 영어교육이라고 하는 EBS 방송의 영어교재에도 영어가 빠져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린이들의 교과서를 살펴보았습니다. 초등학교의 영어교과서도 영어와 잡것이 혼란스럽게 섞여 있어서 도저히 영어가 보인다라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피와 모가 뒤섞여 우거진 들판을 보는 듯 하였습니니다. 농부가 아닌 다음에야 피와 모를 구분해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어렸을 적 논에서 피를 뽑다보면, 피는 모보다 더 억세고 더 돋보이며, 더 모처럼 보이기도 하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농사꾼이 아니면 피와 모를 구분하여 제대로 솎아내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영어도 영어꾼이 아니면 모영어와 피영어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치 저만 영어꾼이고 그 밖의 모든 사람은 영어꾼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사실상 영어꾼도 아니면서 자타 영어꾼이라고 하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흙과 농사의 절기에 능숙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농사꾼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어와 언어의 절기(습득과정)에 능숙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영어꾼이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설사 영어에 능숙한 영어통이라고 해도, 한국적 상황에서 영어를 습득해본 경험이 결여되고, 그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다면, 한국의 영어교육을 이끌어 가는 영어꾼으로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물며 영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자칭 영어꾼들에 의한 자기방식의 교육은 그 한계가 불을 보듯 뻔한 것입니다. 한국의 영어교육에 영어가 없는 것은 영어교육자들이 한국적 상황에서 영어를 제대로 습득하기 위한 방법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한국의 영어교육에 영어가 없다라고 주장하는데 있어서 제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그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까지 실시해 온 한국의 다양한 영어교육 프로그램에 영어가 있었다면, 그동안 대대손손 영어공부에 전적으로 매진해온 무수히 많은 학생들이 그 영어를 터득하는 것이 당연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별도의 방법을 활용하여 영어를 습득한 소수의 경우를 뺀다면, 그러한 영어교육 프로그램을 통하여 유창한 영어를 습득한 사람이 (우리가 주변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이렇게도 없다는 사실은 바로 그곳에는 영어가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영어교육에 영어가 없다고 하여, 미국이나 다른 나라의 영어교육 프로그램에는 영어가 넘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제가 볼 때에 정신나간 소리 같이 들리겠지만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적으로 실시되는 영어교육 프로그램들의 대부분에도 영어는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국가에서 실시하는 영어공교육은 오십보백보의 차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세계적으로 영어선생님을 보급하는 미국 대학들 및 일반 사립기관들이 제공하는 TESL 프로그램의 커리큘럼을 보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TESL 학위는 마치 외국어로서의 영어교육에 대한 전문성과 권위를 상징하는 듯 합니다. 한국의 국내 대학에서도 TESL 프로그램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 상당히 불경스러운 말이지만, TESL이 진정 외국어로서의 영어를 가르치는 교수법을 마스터 했다는 최고의 전문성과 권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이미지와는 사실 거리가 멀다고 봅니다. 제가 일반적인 TESL 프로그램들을 살펴보고 느낀 점은 그저 그 분야에 대한 기초지식을 익혔다는 정도로 보는 것이 맞다라는 것입니다. 더욱 불경스러운 말은 현재까지의 TESL 프로그램은 제가 보고 느끼기에 전통적인 재래식 영어교육의 방법을 답습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K 형, 글재주가 부족하여 딱딱한 주제를 갖고 부드럽게 글을 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자녀의 영어교육을 위해서는 영어를 제대로 찾아서 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로써 이제까지 해보았지만 실패했던 방법의 영어교육은 자녀들도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당연한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시간과 재정의 낭비는 정말 안타까운 것이고, 그 결과는 또한 허망한 것입니다. 앞으로 한 번 더 다루겠지만 영어는 말배우기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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