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를 넘는 보나파르도>, 1800~1801년, 캔버스에 유채, 272X232, 말메종 샤토 국립미술관 소장.

 

     현대의 가장 큰 권력은 홍보다. 숨어서 선행을 베풀지 않고서는 무슨 일이든지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는 홍보 전략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성공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홍보 전략이 뛰어난 사람은 나폴레옹이다. 그는 가장 빠르게 성공한 사람으로, 정치 선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또 적절하게 이를 잘 이용했다.
나폴레옹의 이미지를 극대화한 작품이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의 ‘알프스를 넘는 보나파르도’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시절부터 선전 미술과 정치, 신문, 삽화 등을 통해 정치적 이미지를 만들고 그 이미지가 가질 수 있는 파급력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나폴레옹은 그림의 주문과 검열, 수상제도를 철저히 운영해나갔다. 화가들은 정부의 주문을 받기 위해서는 정부 입맛에 맞는 그림을 그려야 했다. 나폴레옹 시대의 화가는 황제의 이상적인 모습을 선전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에게 화가는 군인과 마찬가지로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높여주고 훗날 자신이 만든 정책을 빛내줄 수 있는 존재였다. 나폴레옹은 그 당시 프랑스 미술의 흐름을 자신의 취향대로 이끌어갔고 황제 양식이라는 새로운 양식까지 등장시켰다. 그러면서 나폴레옹은 장르의 구분 없이 미술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끼쳤다.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보나파르도’는 나폴레옹이 스페인 왕 카를로스 4세의 초상화를 보고 의뢰한 작품이다. 새로운 시대에 등장한 영웅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미화한 이 작품의 성공으로 다비드는 그 이후 3년 동안 조수들과 네 점의 복제화를 더 그렸다.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 나폴레옹은 황제가 아니었지만 나폴레옹의 시대를 열 만큼의 충분한 권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사나운 말 위에 앉아 나폴레옹은 비탈길을 행해 돌진하고 있다. 그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알프스 저 너머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나폴레옹 발밑에는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 대제와 샤를마뉴 대제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1800년 나폴레옹 보나파르도는 실제로는 말 대신 산길에 강한 노새를 타고 알프스를 넘었다고 한다.
다비드는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나폴레옹에게 직접 모델을 해달라고 청했으나 나폴레옹은 이를 거절했다. “초상화와 내가 닮고 안 닮고는 중요하지 않다. 천재의 창의력을 발휘해서 그리면 된다”고 했다. 또 그는 전쟁터를 배경으로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앞발을 든 말 위에 평온한 모습으로 그려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타고 있는 말을 표현하기 위해 러시아 황제 표트르 대제의 기마상의 말을 보고 묘사했으며, 말에 앉아 있는 나폴레옹을 그리기 위해서는 제자를 말에 태워 모델로 삼았다.
다비드는 이 그림에서 영웅의 모습을 드라마틱한 구도와 치밀한 디테일 등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표현했다. 하지만 긴박한 전쟁의 상황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너무나 완벽한 포즈와 시선, 복장 등으로 오히려 현실감을 떨어뜨려 마치 알프스 풍경그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은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 그림을 보고 매우 흡족해하며 세점을 더 주문해 유럽 각지에 그림을 보냈다. 하지만 이토록 영웅적으로 미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이 원정 첫 전투에서 패했다는 사실은 이 그림의 진정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치 권력에 편승해 그려진 이 그림은 사실과 교차하며 영웅으로 포장된 나폴레옹의 허구를 스스로 드러낸 셈이다.
다비드는 이 작품을 통해 역사적 장면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통치자의 모습을 표현했던 다비드는 프랑스 혁명에 가담해 수석 궁정화가가 됨으로써 나폴레옹 시대에 가장 중요한 화가가 된다. 그러나 다비드는 당대의 역사를 기념하는 그림을 그렸지만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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