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개인적인 환경을 돌이켜보면 이제까지 제가 받은 교육 가운데 가장 실용적인 것은 3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예기치 않았던 상황으로 인하여 공고에 입학하여 전기를 전공했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기계를 다루는 적성도 조금 붙어오는 바람에 기계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높아진 것도 실생활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 다음으로는 비록 제도권 밖에서 혼자서 해낸 독학이긴 했지만 한국에서 영어를 나름 유창하게 습득한 영어교육이었습니다. 몇 년 동안 직장을 다니면서 철학공부에 뜻을 갖게되어 주경야독으로 시작된 입시준비에, 막상 대학은 (졸업후를 생각하여, 철학은 대학원에서 하기로 하고) 영어영문학과를 다녔지만, 그것과 제가 영어를 능숙하게 습득한 것은 별개의 과정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영문과나 영어과를 졸업했다고 해서 영어에 능숙해지는 대한민국 국민은 거의 없습니다. 언어서비스 중심의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현재의 삶이 나름 보람되고 만족스러우며, 앞으로의 삶도 크게 다를 것이 없을 것이라는 것으로 보아, 저에게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독학으로 습득했던 영어가 결과적으로 가장 실용적인 교육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또한 지금도 여차하면 제가 배웠고 회사에서 재미있게 일했던 전기 기술자의 인생도 살아갈 수 있다는 마음의 여유로움이 있습니다.
세번째로 저에게 실용적인 교육은 컴퓨터를 배운 것이었습니다. 비록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워드프로세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스프레드 쉬트와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저의 비지니스에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항상 다행이라고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시간을 절약하고, 업무효율을 높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정보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쉬운 것은 아직까지 웹개발 기술을 익히지 못하여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괜히 시답지 않은 제 이야기로 서설이 길었습니다. 저는 이런 저런 저 자신의 경험으로 보아 자녀들에게는 삶을 지탱하는데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수단을 갖추도록 권할려고 합니다. 조급하지 않게, 그렇지만 너무 늦지 않게 그러한 수단을 챙기도록 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제까지 익혀온 피아노와, 바이올린, 색스폰, 클라리넷의 풍류와 테니스, 농구, 수영, 축구, 재즈밴드, 오케스트라 등의 여가활동을 곁들여, 원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고 싶습니다.
한국에서부터 미국까지, 허겁지겁 반 백 년을 살고나서 이제 겨우 숨을 고르며 정신차리고 뒤돌아보니, 그렇게 좇아왔던 큰 것은 원래부터 없었고, 오직 작은 것들이 귀하며, 작은 즐거움들이 큰 즐거움 되는 것이 보입니다.

4. 차별없이 기회를 찾는 자녀교육

     제가 한국에서 직장을 다닐 때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부서의 주임 아들이 공부를 대단히 잘 하는데, 같은 학교에 다니는 그 부서의 아들은 주임 아들보다 공부를 못하기 때문에, 부장이 주임한테는 쉽게 대하지 못한다, 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시골 동네에서 어느 집 자녀가 명문대학에라도 합격하면, 동네 어구에 플래카드를 곳곳에 걸고, 대자보도 붙일 곳은 붙히며, 온 동네가 잔치를 벌이고 부모가 크게 한 턱 내는 일은 누구나 익숙히 알고 있는 일입니다. 자녀교육에 모든 것을 기대하는 한국의 정서에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누군가가 사법고시라도 붙으면 역시 온 동네가 떠들썩한 분위기에 한 동안 술렁거리기도 하였습니다.
미국도 한국의 정서와 비슷하다면 이번에 김용총재의 세계은행 총재 선출과 관련되어 김총재의 소속 대학인 다트머스 대학의 캠퍼스는 색색의 플래카드로 화려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미국은 캠퍼스는 물론 길거리에 플래카드를 거는 일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까지 미국에서 살면서 플래카드가 나부끼는 것을 본 것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해마다 여름에 열리는 세익스피어 축제를 알리는 플래카드를 몇 번 본 적이 있고, 건물벽에 붙은 현수막을 본 적도 있지만, 한국과 같이 거리마다 캠퍼스마다 곳곳에 펄럭이는 플래카드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이곳의 고등학교는 어느 학생이 명문대학에 입학을 했다고 해서, 교문이나 캠퍼스에 현수막이나 플래카드를 걸고 분위기를 띄우는 경우도 없습니다. 사실 한국식 교문도 없고, 캠퍼스도 한국식 교정의 캠퍼스가 아니라, 학교 건물자체 내에서 학생들의 모든 활동이 이루어지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한국의 교정 문화와 비교하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이처럼 학교에서 어느 특정 학생의 두드러진 성과를 부각시키거나 특정인의 출세(?)에 그렇게 떠들썩하지 않고, 비교적 훨씬 조용하게 개별적으로 축하하는 것은 여러가지 문화적인 특징이 반영된 관습이라고 봅니다.
그 첫째는 다양성을 이루는 개성과 가치관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개성을 갖고 있으므로, 특정 분야에서 어느 한 사람의 두드러진 성과는 어디까지나 그 사람 개인의 성과이며, 특별히 개성과 영역이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이나 선망의 대상으로 확대하려는 성향이 없는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의 성과에 대한 인정과 칭찬은 인색하지 않지만, 실제로 자신의 삶과 그러한 사람들의 삶을 견주어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즉, 타인의 삶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상관하지 않고, 상관되기를 거부하는 'I don't care'식 문화가 있다고 봅니다.
둘째는 차별에 대한 의식적인 거부문화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누구나 모두가 동등하며, 차별될 수 없는 인격과 가치 및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다는 인식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수많은 학생들 가운데 잘하는 학생만을 부각시키는 것은 그 외의 다른 학생들에게 상대적인 열등감을 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이와 같은 생각은 그동안 미국에 살면서 저에게 형성된 가치관이기도 합니다. 가령 저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특정 학생만을 집중조명하는 일이 있다면, 저는 분명 학교에 찾아가 이의제기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와 같은 가치관은 누구나 미국에서 자녀를 키우며 오랫동안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저에게는 아들과 딸이 한 명씩 있습니다. 저의 아들은 아빠와 엄마를 닮아서 운동을 썩 잘하는 편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와 농구 및 수영 등의 운동을 다른 학생들과 같이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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