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총재의 부친은 김총재가 정치학이나 철학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 했을 때에, 그 두 가지에는 삶을 이끌어갈 실용적인 면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삶을 이끌어갈 실용적인 수단으로 의과대학을 권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속으로는 '아이고, 이놈, 큰 일 났구나. 밥 굶어죽게 생겼구나'라는 염려가 무겁게 가슴을 눌러왔을 것입니다.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 정치나 철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 염려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속으로는 다급하지만 겉으로는 아들을 믿는 마음으로 의대과정을 마치면, 그 다음부터 네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해도 좋다, 라고 했을 것입니다. 대학 2학년이던 아들은 그 말에 영향을 받고, 그제서 진로를 바꾸어 의대과정을 마치고, 또 공부하고 싶었던 인류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대학교 2학년에 그처럼 진로를 바꾸어 새로운 분야에 도전을 할 수 있는 미국의 제도적 및 사회적 관행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미국 사람들은 언제든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는, 그것을 진지하게 시작한다는 자유분방함이 몸에 배어 있는 듯 합니다. 제가 처음 유학을 왔을 때, 같은 대학원 입학동기 중에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적어도 50은 넘은 할머니 같은 미국 아줌마가 있었습니다. (미국 사람들 나이는 지금도 쉽게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40대 50대로 보이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대학원에 입학하여 마치 일하듯이 공부하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아마 그래서 여기 사람들은 공부하는 것을 마치 일한다는 개념과 같이 work라는 표현을 쓰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요즈음에 추세가 다소 달라지는 듯 하지만, 여전히 나이를 바탕으로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는 인생의 단계적인 과정에 대한 제도적 및 관습적 환경 때문에 그와 같이 개인의 필요와 관심에 따른 실용적인 선택의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고 생각됩니다. 대학을 입학할 때에 이미 전공이 결정되고, 삶의 영역이 결정되는 것이 한국의 제도와 사회적 통념입니다. 이처럼 인생의 진로가 빨리 결정된다는 것의 장점도 있겠지만, 사회적 융통성이나 개인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선택이 결여될 수 있는 문제점도 있습니다.
K 형은 자녀가 정치학이나 철학에 관심이 있다고 하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엇을 권하시겠습니까? 여기서 정치학이나 철학을 언급하는 것이 그 분야에 대한 어떤 바람직하지 못한 편견을 파급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분명히 해야할 것 같습니다. 단지, 김총재의 에피소드에서 소개된 상황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생각해보기 위한 것으로만 제한하겠습니다. K형, 이제 생각해보십시요. 딸에게는 무엇을 권하겠습니까? 아들에게는 무엇을 권하겠습니까? 아니면, 산 입에 거미줄 칠 일은 없으니까 그냥 자녀들의 선택을 존중하시겠습니까? 또 아니면, 명문대만 들어간다면 정치학이든 망치학이든, 철학이든 목학이든 취직은 될거니까, 무조건 괜찮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김총재의 부친이 그렇게 했듯이 우선적으로 언제든지 생활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취직이 잘 되는 실용적인 공부를 하도록 권하고 싶습니다. 물론 자녀의 적성과 취향에 완전히 어긋나는 분야는 지양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지망하는 학교가 명문대든, 일반 대학이든, 전문학교든 그것은 자녀의 학업능력과 욕심 및 부모의 경제적 능력을 고려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정규대학의 중국어학과 지망을 고려하면서 진로문제로 고민하던 질녀에게 간호계열 전문학교를 권했던 적이 있습니다. 훗날 질녀는 어렵지 않게 취직과 휴직, 어학연수 및 취직을 본인의 계획대로 할 수 있는 여유를 갖은 반면, 정규대학에 갔던 많은 친구들이 취직을 못하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것을 보면서, 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 삼촌이 그렇게 조언을 해주어서 그대로 따른 것이 참 잘 됐다고 했습니다. 이제라도 그 조카가 중국어와 중국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나름대로의 생활기반을 잡고 또 다시 시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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