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역시 여러 해 전의 일입니다. 당시 텍사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가 있었던 대학에 다니던 학생이었습니다. 역시 모계의 한인혈통을 받은 미국인이었습니다. 봄학기 성적처리를 마무리한 몇 일 후 꽤 뜨거웠던 봄 날, 그 여학생을 만나야 했습니다. 그 여학생은 저에게서 3학기를 연속으로 들었습니다. 그 전 학기에는 모두 A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학기에는 B를 받았습니다. 그 학기에는 매주 월요일마다 주말에 있었던 일들을 한국말로 써서 발표하고 제출하는 비중이 높은 숙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그 학생은 전화나 이메일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주말에 있었던 일을 손 쉽게 썼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혼자서 하는 학습과정이므로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발표하는 과정에서 그 이야기를 소화시켜서 자신의 이야기로 발표하지 못하고, 단순히 읽었던 경우가 많았던 점과, 늦게 제출된 일부 숙제 및 여러 개의 퀴즈와 2개의 중간고사 그리고 기말고사의 시험성적이 성적에 반영된 것이었습니다.
약속시간에 그 여학생이 들어왔습니다. 무엇을 도와줄까, 라고 묻기가 바쁘게 그 학생은 저의 3학기 커리큘럼에 문제가 있다면서 불평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3학기 과정은 자신과 같이 한국어를 대학에서 처음 배우는 학생들에게 불리하며, 이미 한국말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학생들에게만 유리한 수준으로 짜여졌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말을 할 수 있는 학생들이 모두 높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에 자기는 상대적으로 낮은 점수를 받았다는 (사실과 다른) 주장을 했습니다. 자기는 이제까지 대학 3년 동안 계속 A 만 받았으며, 자기 동생 역시 미육군 사관학교에서 줄곧 A를 받고 있기 때문에, 3학기 한국어 수업도 적합한 수준의 커리큘럼이었다면 자신은 당연히 A를 받았을 것이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학생이 성적에 만족하지 못하고 당황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학생의 사실과 다른 일방적인 주장에 대하여, 한국어를 그 학생보다 잘 하는 학생들 가운데 B 보다 낮은 성적을 받은 학생들이 있다는 것과, 그 학생과 유사한 환경의 학생들 가운데서 B보다 높은 성적을 받은 학생들이 있다는 것을 설명해도 그 학생은 막무가내였습니다. 그 밖에 자신의 주장에 대한 논리적인 모순을 지적하자, 그 학생은 자신의 아버지가 변호사라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학과장과 면담하고, 총재와도 면담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로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얼른 그 학생과의 면담을 마무리했습니다.
저는 그 학생이 염려되었습니다. 어쩌면 그 학생의 주장대로 제가 커리큘럼의 수준을 이상적으로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국어 과목을 수강하는 학생들의 일반적인 특성상 매년 매학기마다 학생들의 수준이 파악되기도 전에, 한국어에 대한 배경이 다양한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수업의 커리큘럼 수준을 조정하는 일에 부족한 점도 분명히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문제해결을 위한 그 학생의 그러한 접근은 쌍방의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했던, 아쉬웠던 에피소드였습니다.
K형, 어쩌면 제가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와 같이 현실과 동떨어진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눈 감으면 코 벼가는 세상에서 '품행'을 논하고, 사회배려와 책임을 논하는 것이, 마치 실용적이지 못한 조선시대 양반이 유교의 가르침만을 주장했던 과오를 범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합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우리가 자녀들에게 올바른 품행을 심어주지 못하면, 그래서 품행의 기반이 견고하지 못하다면 그 위에 세워진 우리 자녀들의 삶은 아무리 번드르하고 근사한 출발처럼 보일지라도, 서서히 매마르고 따돌림 받다가 스러지는, 어느 날 폭삭무너져 내린 삼풍백화점을 보듯 허탈하고 무의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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