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놔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
가락국 수로왕의 신화에 등장하는 고대가요 ‘구지가(龜旨歌)’. 2000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 뜻이야 다르지만 구지가의 거북이처럼 꽁꽁 숨어 아내를 애태우는 현대 남편이 꽤 많다.
“집에 들어오면 방에 들어가 꼼짝 안 해요. 꼭 거북이가 껍질에 쏙 들어가 묵묵부답이듯.”
결혼 3년차 30대 아내는 남편 J씨 때문에 속이 터진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걸핏하면 남편이 은둔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저도 이제 지쳐요. 아이도, 아내도 안중에 없고 남편 역할과 담을 쌓은 지 오랩니다.”
J씨는 힘들 때마다 껍질 속으로 숨는다. 이런 남자들 중엔 무성애자이거나 사회성이 극히 부족한 사람도 있지만 J씨는 그런 것도 아니다. 남들에게는 잘하고 사회생활도 열심히 한다. 그런데 집에만 오면 혼자만의 공간에서 세상일을 잊고 지내는 게 마음 편할 때가 많다. 아내와 무슨 갈등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오히려 이런 행동에 아내는 영문을 몰라 속이 터지다가 분노감까지 들게 됐다.
“제 남편이 꼭 여자들처럼 생리를 하는 것 같아요. 생리 전에 여자들이 예민해지는 거랑 비슷하거든요. 근데 요즘 들어 너무 자주라서….”
여성들은 생리 주기에 따라 호르몬이 변하는데, 생리 전에 예민하거나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우울·불안·두통·폭식 같은 생리전 증후군을 보일 수 있다. 주된 원인은 생리 주기와 관련된 호르몬의 불균형 때문이다. 남성은 생리를 하지 않으니 주기적인 호르몬 변화나 불안정은 없다. 또한 여성은 호르몬 주기에 따른 정서적 불안정이 예측 가능한데, 남성의 경우엔 여성처럼 예측이 가능하지 않다. 그게 남녀의 차이다.
일반적으로 여성이 정서적으로 더 민감하므로 대하기가 까다롭다고 여긴다. 하지만 덜 민감하다고 알려진 남성의 정서적 퇴행이나 위축은 오히려 더 예측하기 어렵고 다루기도 힘들다. 물론 이런 남성들에게는 성격적 결함이나 우울증, 남성호르몬 저하에 따른 갱년기 증상을 겪는 경우가 있다. 앞서 언급한 무성애자 또는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인 경우에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별다른 심각한 질환이 없는 남성이 이런 행태를 보일 때는 사회생활에서 자신의 영역이 부족하다고 느끼거나 영역 싸움에서 졌다고 생각할 때 나타난다. 그래서 집이라는 공간에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고 그 영역 안에서 스스로 보호받으려는 본능적인 시도를 한다. 마치 싸움에 진 맹수가 동굴 속에 숨어버리고, 적군을 만난 거북이가 껍질 속에 숨어버리듯 말이다.
가벼운 수준에서 본능적인 위축이나 퇴행은 누구나 있을 수 있다. 일시적이라면 치유의 시간일 수 있으니 여성의 생리전 증후군처럼 관대하게 지켜보면 된다. 문제는 이런 행태가 지속되면 본인이나 배우자에게 심각한 독이 된다는 점이다. 이때는 자신의 퇴행이 왜 생겼고 어떻게 개선해 나갈지 심리치료가 필요하다. 껍질 속에만 있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만약 더 나빠져 부부갈등이나 섹스리스로 흐르고 있다면 그 근원 배경부터 찾고 관계치료나 성치료까지 가야 할 수도 있다. 이런 남편의 위축과 퇴행은 가장 근원적인 기초사회인 가정에서 많이 드러나기에 그 가족, 특히 배우자인 아내로선 외롭고 힘들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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