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14대 주상인 선조는 후계자 선정 문제에서 아들들 간의 위계질서를 지나치게 중시했다. 그는 서자보다는 적자, 차남 이하보다는 장남을 우선시하는 적장자 우선주의에 과도하게 집착했다.
그가 이 원칙에 얼마나 집착했는지는 죽기 직전의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적자가 없는 상태에서 광해군이 자신을 대리해 임진왜란을 총지휘하고 능력을 입증했으므로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기는 게 누가 봐도 이치에 맞았다.
그런데 임종 직전까지도 선조는 '서른 살이 넘었지만 서자'인 광해군과 '갓난아기이지만 적장자'인 영창대군을 끊임없이 저울질했다. 어떻게든 적장자를 후계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영창대군이 갓난아이가 아니었다면 선조는 주저 없이 영창대군의 손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조가 조금만 더 살았다면, 영창대군이 광해군을 제치고 제15대 주상이 됐을지 모른다.
선조가 다른 왕들에 비해 적장자 우선주의에 유별나게 집착한 것은 그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선조는 왕의 적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왕의 서자도 아니었다. 왕의 아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선조는 왕의 서자의 아들이었다. 그는 중종의 서자인 덕흥군의 아들이었다.
'왕의 아들이 다음 왕이 된다'는 관념이 상식으로 통하는 세상에서 '왕의 서자의 아들'인 선조의 입장은 극히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적장자 아닌 왕자들을 유별나게 박대한 것은 이런 콤플렉스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런 선조의 콤플렉스대로라면, 서자 중의 장남인 임해군에게 좀 더 기회를 주었어야 했다. 적장자 우선주의를 고수한 선조가 서자 중의 장남인 임해군보다 서자 중의 차남인 광해군에게 좀 더 기회를 준 것은 분명히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임해군의 행적을 보면, 선조가 임해군을 냉대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자식들 간의 위계질서에 과도하게 집착한 선조가 보기에도 임해군은 그런 냉대를 받을 만한 아들이었다.
임해군은 한마디로 망나니였다. 선조 39년 8월 23일자(1606년 9월 24일자) <선조실록>을 포함한 몇 군데의 실록에 따르면 그는 민간인을 함부로 구타하고 살해했으며 남의 토지와 노비도 마음대로 강탈했다.
심지어 그는 측근들을 시켜 민가의 닭과 돼지까지 빼앗았다. 무시무시한 악행뿐만 아니라 좀스러운 악행도 저질렀던 것이다. 그는 필요할 때는 사기 행각도 서슴지 않았다. 왕자의 품위 따위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임해군은 성질이 거칠고 학업을 게을리 했을 뿐만 아니라, 하인들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하인들에게 자율권을 지나치게 많이 주는 바람에 하인들을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임해군은 왕실이나 국가 또는 관료의 재산에까지 손을 댔다. 선조 39년 8월 24일자(1606년 9월 25일자) <선조실록>에 따르면, 그는 지방에서 서울에 바치는 공물을 중간에서 강탈하기도 했다. 또 지방 군수가 한양을 방문하면 수행원을 붙잡아두고 군수를 협박해서 재물을 갈취하기도 했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임해군의 비행이 조금만 덜했다면, 선조는 서자 중의 장남인 그에게 기회를 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임해군의 비행은 도를 넘어도 한참 넘은 것이었다. 그래서 자식들 간의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선조로서도 도저히 장남의 체면과 위신을 세워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선조는 임해군과 광해군 둘을 놓고 평가할 때만큼은 위계질서보다 능력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었다. 임해군은 형식주의에 빠진 선조가 제한적이나마 능력주의를 고려하도록 만든 인물이다. 이렇게 보면 임해군은 광해군의 왕위 등극을 도운 조력자가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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