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구암 허준>에서 주인공 허준은 지방관의 첩이 낳은 아들이다. 이 첩은 노비다. 노비 즉 천민 출신의 첩은 천첩이라 불렸다. 그래서 드라마 속 허준은 천첩의 자식이다. 참고로, 자유인 즉 양인 출신의 첩은 양첩이라 불렸다.
그런데 허준의 부인인 다희는 양인이다. 양인 중에서도 상류층인 양반이다. 다희의 아버지는 대역죄를 짓고 유배형을 살다가 죽었다. 다희의 아버지가 지식인 및 상류층의 범죄인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범한 것만 봐도, 다희와 허준의 처지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허준과 처음 만났을 때, 다희는 유배 중인 아버지를 모시고 있었다. 허준은 '다희 아가씨는 양반이지만 아버지의 처지가 저러니까, 나랑 사귄다고 해도 문제없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허준의 어머니도 그랬다. 그래서 허준은 다희와 장래를 약속했다. 허준의 어머니도 두 사람을 응원했다. 
그런데 다희 아버지가 죽은 뒤에 사면을 받으면서부터 허준 모자의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다희 집안의 사회적 지위가 회복되자, 허준에게 다희는 '오르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도 말아야 할 나무'가 되었다. 그래서 허준과 허준의 어머니는 다희를 피했다.
하지만, 다희는 의리 없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는 경상도 산음(산청)으로 떠난 허준을 찾아가서 기어코 허준의 아내가 되고 만다. 허준의 아내가 된 다희는 남편이 유능한 의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내조를 아끼지 않는다. 

    천첩의 자식인 허준이 양인인 다희와 결혼한다는 <구암 허준>의 내용은 물론 사실이 아니다. 실제의 허준은 천첩이 아니라 양첩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양인이었다.
허준이 서른세 살 때인 1571년에 허준의 아버지인 허논의 작위는 정4품 봉렬대부였다. 1485년부터 시행된 법률인 <경국대전>에 따르면, 정4품 관리의 양첩이 낳은 아들은 정4품까지만 승진할 수 있었고 정4품 관리의 천첩이 낳은 아들은 정6품까지만 승진할 수 있었다. 첩의 자식이 아닌 사람은 이런 제약을 받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첩의 자식을 차별함으로써 축첩을 억제할 목적으로 이런 법률을 제정했던 것이다.
허준을 내의원(왕실 병원)에 추천한 유희춘의 <미암일기>에 따르면, 1571년 당시 허준은 종4품 내의원 첨정이었다. 만약 허준이 천첩의 아들이었다면, 허준의 관직이 정6품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허준은 '정4품 관리의 양첩이 낳은 아들'이었다. 허준의 어머니는 양인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허준도 양인이었다. 그가 처음부터 노비였다는 드라마의 설정은 그래서 허구다.
만약, 드라마 내용대로 허준이 정말로 천첩의 자식이라면, 그는 아내인 다희와 이혼부터 해야 한다. 왜냐하면, 천첩의 자식은 노비이고 남자 노비는 여자 양인과 결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천첩의 자식이 여자 양인과 결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됐던 것은 물론 아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어머니가 천첩일지라도 아버지가 왕족, 공신, 관료인 경우에는 일정 조건 하에 양인 신분을 얻을 수 있었다.
'일정 조건'이란 것은 1000일간 보충군에 근무하는 것이었다. 보충군은 얼핏 들으면 군대 같지만, 일종의 공익근무 같은 것이었다. 1000일간 보충군에 근무하면 천첩의 자식도 양인 신분을 얻고 여자 양인과 결혼할 수 있었다.
그런데 드라마 속의 허준은 천민이다. 그는 노비 신분을 숨기고 의사 유의태의 집에서 고용노동자(머슴) 생활을 했다. 드라마 속 허준의 신분이 노비라는 것은 그가 보충군 근무를 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1000일간 보충군 근무를 하지 않는 한, 그의 신분은 엄연히 노비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드라마 속 허준과 다희의 결혼은 원천 무효다. 왜냐하면, 남자 노비와 여자 양인의 혼인은 금지됐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국가는 금지된 혼인을 한 부부를 강제로 떼어놓았다. 강제로 헤어지기 싫으면 서류를 조작하든가 아니면 산속으로 도망해야 했다. 
 18세기까지 노비는 노동력의 주력 부대였다. 그래서 노비가 감소한다는 것은 산업생산이 감소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노동력의 감소를 막기 위해 남자 노비와 여자 양인의 결혼을 금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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