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에서 왼쪽으로 10분 내지 15분 거리. 이곳에는 그간의 복원작업을 거쳐 지난 2일 개방된 경교장이란 2층 건물이 있다. 여기는 백범 김구가 1945년 11월 23일부터 1949년 6월 26일까지 거주했던 곳이다.
영국 왕립아시아협회가 소장하고 있는 1900년도 서울 지도에 따르면, 경교장 왼쪽에 남북으로 흐르는 하천이 있었고, 그 위에 경교라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 이런 사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김구가 경교장에 마지막으로 거주한 날이었던 1949년 6월 26일 일요일이었다. 이날 오전 11시께 30대 초반의 장교가 경교장에 나타났다. 허리에 총을 찬 군인이었다. 그는 약 세 시간 뒤 김구를 암살하게 될 육군 소위 안두희였다.

   안두희는 관리실에 들어가 당직자인 이풍식에게 면회를 신청했다. 안두희는 김구가 위원장으로 있는 한국독립당의 당원이었다. 그래서 김구와는 이미 안면이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 전에도 꽃병을 들고 김구를 면회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안두희의 방문 목적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풍식은 안두희에게 기다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안두희는 관리실에서 한참 기다렸다. 거물급 인사를 암살하러 온 사람치고 그는 너무 담담했다. 관리실에서 잡담까지 건넬 정도였다.  시간이 꽤 흘렀다. 낮 12시 50분께, 면회가 허용됐다. 누가 뭐라고 안했는데도, 안두희는 "무기를 차고 선생을 뵐 수는 없죠"라며, 허리에 찬 총을 스스로 내려놨다. 그리고는 선우진 비서를 따라 관리실을 나와 1층 홀로 들어섰다. 1층 홀의 왼쪽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선우진 비서는 그곳으로 안두희를 안내했다. 계단 앞에서 비서는 돌아섰다. 안두희 홀로 올라가게 한 것이다. 김구와 안면이 있을 뿐 아니라 한국독립당 당원이었기 때문에 그를 믿은 것이다. 안두희는 계단을 따라 2층에 있는 김구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관리실에서 안두희는 허리에 찬 총을 스스로 내려놓고 나왔다. 그런데 2층에 올라간 뒤에 안두희의 몸 속에서는 또 다른 총이 나왔다. 안두희는 방아쇠를 당겼고 김구는 쓰러졌다.  당시 1층 사람들은 총성을 듣지 못했지만, 경교장 밖에서 경비를 서던 경찰관 두 명은 그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이들이 소총을 들고 1층 홀에 뛰어들었을 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뒤였다. 그때 안두희는 유유히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창문에서 뛰어내려 도주할 수 있었는데도, 안두희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체포돼 헌병대에 인도됐다.
 
   안두희는 뭘 믿고 그렇게 여유만만했을까. 안두희는 육군 소위인 동시에 한국독립당 당원이었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안두희는 우파 테러단체인 백의사의 제1소조 요원인 동시에 한국에 주재하는 미군방첩대(CIC) 요원이었다. 안두희는 육군, 한국독립당 및 백의사, 미군방첩대 소속이었다. 앞의 두 조직은 양지에서 활동하는 데 반해, 뒤의 두 개는 음지에서 활동했다.
안두희가 진짜로 충성을 바친 대상은 육군, 한국독립당이 아니라 백의사, 미군방첩대였다. 그는 한국 극우파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반대하고 통일 정부를 위한 남북협상을 추진했다. 그는 1948년에 38선 이북을 방문해서 김일성 등과 회담을 가진 적도 있다. 김구의 꿈대로 통일 정부가 수립됐다면, 가장 큰 불이익을 입을 쪽은 미국이고 그다음은 한국 내 반(反)통일 세력이었다.
김구를 살해한 안두희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수차례 살해 위기를 거치면서 안영준이라는 가명을 써가며 필사적으로 목숨을 부지하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1996년 10월 23일, 인천 자택에서 버스 기사였던 박기서가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79세의 일기로 비참하게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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