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신뢰
신뢰란? 어떻게 보면 사랑보다 더 강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어느 유명한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그 기업의 운영주인 회장에게는 열 자녀가 있다고 치자. 아버지인 회장은 열 자녀 모두를 사랑 할 것이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열 손가락 깨물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는 것처럼, 아버지가 열 자녀 모두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그러나 먼 장래에 어느 자녀에게 그 막중한 기업을 어떤 자녀에게 당신의 자리인 그 회장의 위치에 어떤 자녀가 올라갈 수가 있을까? 그것은 사랑하는 자녀인 동시 신뢰하는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을까?
칼럼을 쓰면서 신뢰라는 단어에 집중해 보기를 원한다. 사전적 의미는 ‘믿고 의지함’이다 신뢰는 규범만큼 강한 규제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재차 신뢰관계가 형성되면 상대의 기대를 벗어나는 행위는 억제한다. 그것에 의해 상대의 행위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 신뢰가 상대의 행위를 예측할 수 있게 할뿐만 아니라 예기(豫期)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지적한 것은 N. 루만(Niklas Luhmann)이었다. 행위자는 상대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을만큼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신뢰가 필요하다. 신뢰는 수중의 많은 정보를 이용함으로써 상대의 행동을 예기할 수 있게 한다.
어린 시절에 어미 닭을 따라다니는 병아리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참 재미있다. 병아리들이 흩어져서 놀고 있을 때 그 주위에다 헌 슬리퍼 한 짝을 던져본다. 병아리들은 정체모를 적(?)의 침입에 종종걸음을 친다. 그것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어미 닭의 날개 속으로 들어간다. 때로는 어미닭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던 한두 마리의 병아리들까지도 멀리 있는 어미 닭을 찾아간다. 그 주변에 몸을 숨길만한 은닉처가 있어도 그런 곳을 피난처로 삼지 않는다. 바깥에서 놀던 어린 아이가 우연히 가벼운 찰과상을 입을 때, 그 아이는 울면서 엄마에게로 달려간다. 그럴 때 엄마의 반응은 극히 간단하다. 아이를 안아주면서 그 상처, 피부가 조금 벗겨졌거나 피가 약간 날 정도의 상처부분을 부드러운 입김으로 호호 불어준다.
그 순간 뺨으로 흘러내리던 두 줄기의 눈물은 마르고, 목청껏 울었던 울음통도 고장이 난다. 참으로 신기하다.
신뢰는 천부의 본능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속에 넣어주신 여러 가지 행복의 요소들 중 신뢰는 거의 으뜸가는 것에 속한다.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 생각만 해도 얼마나 기쁘고 우리의 마음을 행복하게 해주는가! 서로 신뢰하면서 산다는 것은 그 한 가지만으로도 행복의 기본요소를 갖춘 셈이다.
1990년대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파르마에서 뇌의 특정 영역의 기능을 찾기 위해 원숭이를 대상으로 연구를 하였다. 이들은 원숭이의 뇌에서 운동 명령을 내리는 부위라 추정되는 곳에 전극을 삽입하여 원숭이가 땅콩을 집을 때 활성화되는 곳을 찾았고, 마침내 전두피질 F5영역이라는 것을 관찰하게 됐다.
그런데 한 연구원이 원숭이 앞에서 땅콩을 먹고 있다가 이 때도 F5 영역의 신경세포 뉴런이 활성화되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원숭이는 그 연구원을 다만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어진 실험에서는 땅콩 까는 소리에도 신경세포뉴런이 활성화되는 사실을 알게 됐다.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감정 전이가 이루어진다는, 뇌 과학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비견되는 ‘거울 뉴런’이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런 ‘거울 뉴런’을 ‘공감 뉴런’이라고도 부른다. 우리의 뇌에는 공감할 수 있는 기능도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어진 연구를 통해서 보고 듣는 것을 통한 감정 전이를 넘어서 추상적인 정보나 상상을 통해서도 감정을 모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거울 뉴런’을 기반으로 한 공감 능력은 신뢰 형성에 있어서도 중요한 수단이 된다. 인간의 뇌에는 ‘거울 뉴런’이 있어 상대방이 무엇을 생각하고 계획하는지 그 의도를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반대로 신뢰는 공감에 영향을 준다. 우리는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 감정이 달라지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불신이 쌓여 있을 때 상대방의 웃음에 진정으로 즐거워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대인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나와 다른 생각에 얼마나 공감하느냐 하는 것이다. 공감 능력이 발휘되도록 만드는 것은 신뢰뿐이다. 반대로 불신은 공감 능력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부정적 감정을 키우고 불신의 벽을 세운다면 공감적 능력은 감소된다.
신앙생활로 적용해 보면 신앙과 생활은 언제나 함께 가야만 한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이 약화되고 세인들의 조롱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신앙은 있는데 생활이 없는 것 때문이 아닐까?
사회생활을 하면서 좋은 신용을 쌓을 때 사업하거나 좋은 집을 살 때 해택을 보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마찬 가지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신뢰를 쌓는 다면 우리의 장래가 시온의 대로가 활짝 열리는 것처럼 우리의 미래도 활짝 열릴 것이다.
오늘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의 신뢰를 받고 영원한 기업인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는 모두가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