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주국의 후예들
한국에서 가장 많은 동호인을 보유한 체육 종목은 태권도다. 한국 사람치고 태권도 한 번 안 해 본 사람이 없고, 남자는 군대에 가면 모두 유단자가 되니 그도 그럴 것이다. 1973년 세계 태권도 연맹이 설립된 후 꾸준히 성장해온 태권도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어 명실상부한 세계적 스포츠로 자리잡았다. 공식적인 통계는 없지만 전세계의 태권도인들은 6000만 명에서 800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유지되고 회원국이 지금 같은 추세로 늘어난다면 1억 명 돌파는 시간 문제라는 관측이다. 태권도의 브랜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세계 태권도 산업 규모는 연간 5조원에 이른다. 태권도복이나 태권도화 등 용품 시장 규모는 5000억~8000억 원. 발차기미트, 손미트, 샌드백 등 훈련할 때 사용하는 수련용품 등도 전세계에서 꾸준히 팔리고 있다. 무도로서 태권도를 관장하는 기관인 국기원은 전 세계에 단증을 발급하는 유일한 기관으로 1년에 한국에서 43만장, 해외에서 9만 여장, 재발급 5만~6만장의 단증을 발급해, 연간 100억여 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태권도는 사실상 한류의 원조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과 대한민국 국민은 태권도 종주국이라는 인센티브를 갖고 있으면서도 태권도의 발전에 더딘 걸음만 하고 있어 보인다. 특히 이민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지난주 오로라 소재 한 중학교에서 태권도 대회가 열렸다. 전국에서 약 3백여 명의 선수들이 출전해 무도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태권도 정신을 이어가자는데 의의를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대회는 아이들을 이용해 돈을 버는 결과만 낳았다. 여느 동네의 조그마한 대회와는 달리 시합 전날 더블트리 호텔에서 몸무게와 신장을 재면서 다소 체계적인 경기 진행을 예감케 했다.
하지만 경기 당일, 겨루기 부분에 출전한 아이들은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3시간을 멍하니 차가운 바닥에 앉아 자신의 이름을 부르기만 기다렸다. 학교내 두 개의 장소에서 나눠서 이 대회는 경기가 시작 되기 바로 직전까지 몇 시에, 둘 중 어느 체육관에서 경기를 해야 하는지도 몰라 당황했다. 자칫 화장실에라도 다녀오는 사이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었을까 어린 선수들은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이처럼 대회 진행 절차는 많이 엉성해 보였다.
참가비 80달러, 입장료 한 사람당 7달러씩에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출전하는 올림픽 스파링 부분을 위해 별도 발 전자장치를 65달러에 구입을 해야 한다. 이는 스파링 부분에 참가하는 모든 선수들에게 요구된 기본 사안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170여달러를 내고 대진표 한번 보지 못하고, 경기 직전까지 장소도 모르고, 하루 종일 굶으면서 우왕좌왕하다가 딱 3분 뛰어보고 끝난 선수들이 수두룩했다. 이번 대회는 멕시코계 미국인이 주최한 대회였다. 대회를 지켜보면서, 한인 사범들이 협력한다면 보다 체계화된 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우리는 태권도 종주국의 국민들이다. 올림픽 태권도 위원회 등 세계적인 태권도 관련 협회는 외국인들로 채워진 지 오래이고, 기존 단체라고 해도 분열되어 각자의 목소리를 내는데 열중하고 있다. 태권도의 중심단체는 국기원과 세계태권도연맹(WTF), 국제태권도연맹(ITF)이다. 김운용씨가 국기원과 세계태권도연맹의 수장을 겸임할 당시에는 강한 리더십과 빠른 판단력으로 사업 수행이 원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ITF 최홍희 총재와의 경쟁구도 속에서 태권도는 WTF와 ITF로 양분되어 40년 넘게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콜로라도에서 가장 권위있는 대회는 한인 사범들이 주축이 되어야 마땅하다. 콜로라도와 같은 작은 이민사회에서는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과제다. 평소에는 각자의 도장 일정에 따라 움직이더라도, 일년에 한번쯤은 한인 사범들이 주축이 되어 콜로라도주에서 가장 권위 있고, 규모가 큰 대회를 열어야 하는 것이 태권도 종주국의 후예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이를 위해서는 사범들의 단결이 필수적이다.
물론 현재 존경받는 사범들도 많다. 하지만 태권도가 무엇인가. 한국의 전통 무예로서 예와 의를 다하고, 돈보다는 명예를 쫓아야 하는 자랑스런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그날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의 90%가 외국인이었고, 대회 진행자의 90% 이상도 한국인이 아니었다. 이처럼 세계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태권도에 우리 스스로가 소홀히 하고 단합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는 무도인이라 부르기 힘들다. 이곳 콜로라도에는 유능한 사범들이 많다. 이제는 선후배들이 통합해 진정한 ‘1억 태권도 가족’을 만들 수 있는 혜안의 기초를 마련하길 기대해 본다. <편집국장 김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