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유교입니까?
남편이 우스갯 소리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밥 먹을 때, 한국에서는 연장자 순서이지만 서양에서는 아이, 부인, 개 다음에 남편에게 음식을 준다고 말이다. 듣는 여자들은 크게 웃었고, 남자들은 다소 쓴 웃음을 보였던 기억이 난다. 이십대 중반에 타국에서 생활할 때, 한 미국인 가정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 받은 적이 있었다. 식사시간이 되었을 때, 주인은 제일 어린 아이들부터 식탁에 앉히고 음식을 주었다. 나보다 연장자도 있었는데 그 분에겐 제일 늦게 음식이 주어졌다. 오랜 시간 유교문화권에서 살아온 나에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오늘날 유교의 발원지인 중국에서는 유교의 영향력을 찾아보기 어렵다. 유교의 영향력은 신기하게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데, 삼국시대 부터 정치와 교육에 깊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유교 사상은 널리 국민 일반에게 보편화되어 가정과 국가를 유지해 가는 정신적 지주였으며, 예의·염치를 존중하고 군자 되기를 힘쓰고 소인됨을 부끄러워하는 윤리의식은 드디어 외국인으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란 평을 받게까지 되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유교는 한국의 역사발전에 있어서 많은 폐단도 드러냈다. 너무 예의에 집착한 나머지 체면차리기에 급급하여 관혼상제를 과하게 치르는 폐단이 생겼다. 선비 신분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국민간의 적대의식이 생기고 유교의 이름을 팔아 국민을 기만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학문 이외의 것을 천시여겨 농업 이외의 상공업과 과학기술도 발전시킬 수 없었다. 많은 아름다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공자의 도덕은 정치, 남성, 어른,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이 되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기본이라는 공자의 이념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고 노인과 청소년 사이에 싸움이 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임신해서 지하철을 타고 서서 다닐 때도 어른들은 나를 거들떠 보지 않았다. 동네에 장애우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려고 하면 머리에 두른 띠 하나로 대동단결하여 결사반대를 외치기에 급급하다. 술마시고 성폭행하면 ‘심신미약상태’라며 그 남자 어른을 쉽게도 풀어주는 것이 우리의 법이다. ‘약자를 위한 세상’이 아닌 것이다. 임금은 충성을 강조하며 백성을 누르고 어른은 공경 받아야 한다며 아이를 누르고, 남편은 집안의 머리라며 아내를 누른다. 그러면서 이것이 유교의 가르침이라 한다. 어디에도 ‘약자를 위한 배려’는 없다.
만약 우리가 ‘약자를 배려하는 법’을 일찌감치 배웠다면 어땠을까?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이 아니라 꼴찌에게도 분명 장점이 있고 그 아이가 담당하게 될 세상의 한 부분에 대해 격려를 보냈다면 어땠을까 말이다. 이번 런던 올림픽에서도 많은 메달이 나왔다. 공을 세운 선수들은 밝은 미래가 보장되어있다. 그러나 장애인 올림픽 선수들은 어떤가? 실업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선수들은 수영장의 라인을 개인 돈으로 빌려서 쓴다. 돈이 없는 선수들은 생계 때문에 운동을 포기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지만, 사회는 별 관심이 없다.
어른과 아이가 서로에게 양보하는 나라, 통치자와 국민이 존중하는 나라, 남편과 아내가 서로 존경받고 장애가 부끄럽지 않은 나라가 되면 좋겠다. 약자들이 보호받고 또 다른 사람을 보호해 주는 법을 배우며 실천하는 나라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