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새의 미학

2012-02-16     weeklyfocus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는 기억마다 특유의 냄새가 점철되어 있다. 추석을 맞아 시골 어른들 집을 방문한 기억 속에는 시골집만의 고유한 냄새가 함께 떠오른다. 마당 한켠에 만들어진 외양간에서는 소똥 냄새, 쇠죽 냄새가 풍겼고, 재래식 부엌의 가마솥에는 부글부글 고깃국이 끓어오르고 타닥타닥 장작 때는 냄새가 매캐하게 타올랐다. 고소한 부침개 냄새가 온 마당에 퍼져나가고, 젖은 손을 닦으며 나를 반겨주시던 할머니, 아주머니들의 옷에서는 참기름 냄새, 생선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불콰하게 술기운이 오른 먼 친척 할아버지께서 기분좋게 웃으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실 때 할아버지에게서는 담배냄새, 막걸리 냄새가 풍겼다.
돌담이 늘어선 동네에는 가을 향기가 물씬 풍겼다. 가지가 휠 듯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 아래에는 땅바닥에 떨어져 터진 감의 달콤한 향기가 피어 올랐고, 석류 나무에서 빨갛게 익어 벌어진 석류를 따서 입 속에 한 움큼 집어넣으면 새콤달콤한 석류의 향기가 머리 속을 가득 채웠다.

  돌담 대신 탱자 나무를 세운 집들도 있었다. 탱자 나무는 날카롭고 긴 가시가 많아 장난치다가 찔릴 경우 굉장히 아프지만, 탱자 향기는 정말 진했다. 울퉁불퉁하고 못생긴데다 미끈거리기까지 하는 모과 역시 기절할 정도로 향기가 좋았다. 돌담길을 걸어가다 보면 들국화 같은 야생화들이 길거리에 흐드러지게 핀 채 따뜻한 가을 햇살 속에서 가을 향기를 마음껏 발산했다.

 모진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오면 자연은 냄새부터가 달라졌다. 밭두렁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을 뚫고 달래며, 쑥, 냉이 같은 봄나물들이 하나 가득 봄향기를 안고 고개를 내밀었다. 겨우내 꽝꽝 얼어 고요하기까지 했던 강둑은 얼음이 녹아 요란하게 흐르는 개울물 소리와 함께 청명하고 사각거리는 봄의 향기가 흘러내렸다. 산에는 지천으로 흐드러진 화려한 분홍빛 진달래가, 뒷산 무덤가에는 아기 솜털처럼 보드라운 할미꽃이 은은한 봄향기를 발산하며 짧은 봄을 아쉬워했다.

 여름에는 친척 아주머니의 하우스 참외의 달콤한 향기가 떠오른다. 하우스 한켠에 가득 쌓인 노란 참외가 내뿜던 그 참을 수 없는 유혹, 갓 딴 신선한 참외를 한입 베어 물면 꿀보다 더 달콤한 향기가 입안 가득 퍼졌다. 여름 밤, 청명한 밤하늘을 향해 목청좋게 떠들어대던 개구리들의 합창 소리 뒤켠에는 맹렬했던 한낮의 더위를 식히던 시골 아낙네들의 모깃불 냄새와 땀냄새가 떠들썩한 웃음 꽃과 함께 피어났다.   

 남편의 기억 속에도 냄새가 있다. 시어머니가 구워주시는 애플 파이, 복숭아 파이, 고소한 초콜릿칩 쿠키의 향기가 있다. 시어머니에게서 늘 풍기던 담배냄새가 있다. 추운 뉴욕주 시골에서 겨울이면 두 볼이 빨갛게 얼도록 눈썰매를 타던 어린 시절의 남편에게는 시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따뜻한 스튜의 향기가 있다.  눈을 감으면 추억 속의 향기가 떠오른다. 인간의 후각이 기억과 결합되면 그 기억은 더욱 더 선명해지는 모양이다. 내가 보았던, 내가 맡았던, 내가 느꼈던 그 추억들을 우리 아이들과 공유하고 싶다. 아이들에게 그 기억들을 물려주고 싶다. 자라온 환경과 문화가 다른 우리 아이들에게 지극히 한국적인 그러한 냄새들을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이 먼 훗날 어린 시절을 기억할 때 무슨 향기를 떠올릴까 궁금해진다. 우리 아이들은 나를 어떤 향기로 기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