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합니다
풍성한 수확의 계절인 가을, 지구촌 곳곳에서는 다양한 축제가 벌어진다. 그 명칭과 시기는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조상과 신, 자연에 감사하며 풍요로움을 즐긴다는 축제의 의미는 비슷하다. 한국은 추석, 미국은 추수 감사절, 중국은 중치우지에, 프랑스는 투 생, 러시아는 성 드미트리 토요일, 베트남은 테트룽뚜, 아프리카는 콴자, 인도 남부에선 퐁갈 날 등이 바로 그 축제의 날이다.
미국 최대의 명절인 추수 감사절이 이번 주로 다가왔다. 추수 감사절은 명절인 동시에 크리스마스와 신년 정초까지 이어지는 쇼핑 시즌이 시작되는 시기여서, 백화점 등 유통업계가 일년 내내 노리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쇼핑족들 또한 추수 감사절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추수 감사절 바로 다음날인 금요일부터는 파격적인 할인판매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날 새벽부터 미친 듯이 백화점과 할인매장으로 돌진해 물건을 싹쓸이 한다. 할인 폭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에 전날부터 상점 앞에서 몇 시간씩 줄을 서는 광경도 종종 본다. 평소에는 양보심도 많고 점잖던 미국 아줌마들도 이날만큼은 좋은 물건을 먼저 집기 위해 과격한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고 물건을 두고 다투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뉴욕의 월가에서는 추수 감사절 다음날을 검은 금요일, 블랙 프라이 데이라고 부르는가 보다. 이는 연말 쇼핑 시즌의 시작인 이날부터 쇼핑인파가 몰려들면서 유통업체들의 재무제표가 흑자로 돌아선다는 의미라고 한다. 뉴욕의 채권시장도 조기 폐장하고 본격적인 공휴일 모드로 접어든다. 한국 뉴스에서 봐왔던 민족 대이동이 미국내 뉴스에서도 나온다. 4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고향이나 관광지로 이동하면서 각 도시의 공항도 분주하다. 연휴기간 중 귀성 인파만 약 3천만 명에 달한다. 전체 인구를 따져보면 최소한 8명 가운데 1명은 고향과 가족을 찾아가는 셈이다. 한국의 추석처럼 떨어져 사는 부모님도 찾아가고, 직장 때문에 헤어졌던 가족들, 대학 진학으로 인해 멀리 있던 가족들이 함께 모인다. 이렇게 가족을 모이게 하는 역할만으로 최대 명절이라는 이름 값은 하는 것이다.
미국에서의 추수 감사절은 한국의 추석처럼 큰 명절이다. 처음 미국에 와서 추수 감사절을 맞았을 때는 그날 하루를 덤덤히 보냈다. 비디오 몇 편과 함께 말이다. 당시는 터키 요리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다지 입맛을 당기는 요리가 아니었다. 보기에도 참으로 부담스러운 터키였다. 하지만 그 다음 해는 추수 감사절 기분을 한 번 내보자는 생각에 마켓에 터키를 사러 갔다. 여전히 큰 덩치로 포장되어 있는 그것을 보면서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큰 맘을 먹고 한마리를 사서 요리 책에 나와있는 비법을 따라해 봤지만 맛은 실패였다. 비록 맛은 실패였지만 가족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어보는 시도는 나름 의미있었다.
이 추수 감사절은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정착한 청교도들이 가을걷이를 끝낸 후 인근의 인디언 족과 음식을 나눈데서 비롯되었는데, 지금은 흩어져 살고 있는 가족들이 모여 칠면조 요리를 즐기는 시간이 되었다. 그래도 추수 감사절은 하나님께 결실과 수확의 은덕을 돌리며 감사하는 날이라는 유래는 변하지 않는다.
요즘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인 개그 콘서트를 보면 ‘감사합니다’ 라는 코너가 있다. 대학 등록금이 없어 걱정했는데 수능시험에서 아는 문제가 하나도 없어 감사하다, 신발 벗고 들어가는 식당에서 발냄새 걱정을 했는데 동료가 청국장을 시켜서 다행이었다, 게임한다고 PC방에서 밤늦게 집에 와서 엄마한테 혼날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술을 먹고 더 늦게 집에 오는 바람에 무사히 위기를 넘겨서 아버지에게 감사하다는 등 생활의 모든 것까지도 감사하자는 의미를 담은 풍자개그 코너이다. 미국에 사는 세살짜리 아이들까지도 ‘감사합니다, 괜찮습니다, 미안합니다’를 율동에 맞춰 따라할 정도니 그 인기를 실감할만하다.
그렇다면 이 프로의 인기비결은 뭘까. 율동과 사건 정황이 재미있긴 하지만, 이보다도 우리가 바쁘고, 힘들다는 이유로 사소한 것에 감사한 것을 잊고 산 것을 깨닫고 공감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제부터라도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생활 속에 넣어보자. 이렇게 예쁜 딸과 아들을 가지게 해 준 것도, 많지는 않지만 밥 먹고 살수 있을 정도로 벌 수 있는 것도, 이런 불경기에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도, 오래됐지만 1년은 거뜬히 달릴 수 있는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 것도, 낡고 허름하지만 더없이 따뜻한 집이 있다는 것도, 추수 감사절을 함께 보낼 가족이 있는 것까지, 비록 사소한 것이지만 이번 추수 감사절에는 이 모든 것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지길 바란다. 터키가 부담스러우면 닭이면 어떤가, 음식의 종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명절이라는 이름아래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감사의 시간이야말로 진정한 명절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편집국장 김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