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사미, 그게 어때서?
10여년 전 서울의 한 영어관련 회사에서 영어 교재 제작하는 일을 한 적이 있다. 당시 그 회사의 부장님과 하루종일 붙어앉아 수십권의 교재를 만들며 친하게 지냈다. 목사 아들이었던 부장님은 학생 시절, 하도 말썽을 부려서 목사 아버지에 의해 콜로라도 그랜드 정션의 한 대학으로 유학을 오게 됐다. 말이 유학이지, 아버지 입장에서는 말썽꾸러기 아들에게 대학졸업장이라도 쥐어주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어쨌든 그 인연으로 부장님은 항상 “내 고향 콜로라도는 지금도 잘 있을까”라고 그리운듯 되뇌곤 하셨다. 부장님이 유학왔던 시절은 지금으로부터 20년도 훨씬 전이었다. 당시 그랜드 정션은 한국 사람이라고는 유학생을 제외하면 미군과 결혼해 온 한인 여성 몇명이 전부였으며, 완전 시골이었다. 한국 음식점은 물론이고, 한국 라면이라도 사려면 덴버까지 나오거나 라스베이거스까지 가야했다.
어느날, 부장님과 친하게 지냈던 몇몇 한국인 유학생들은 한국 음식이 너무 먹고 싶어 주말을 맞아 의기투합해 예닐곱시간 거리에 있는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한식당에 가기로 결정했다. 자동차 4대를 끌고 마치 마피아 조직원이라도 된 듯 일렬로 함께 움직이며 기세좋게 라스베이거스로 출발했다. 그런데 거의 라스베이거스에 다다를 무렵, 마지막 차량에 탔던 부장님의 선배 한명이 그만 일행을 놓치고 말았다. 당시 휴대전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니 서로 연락할 길은 막막했고, 부장님을 비롯한 나머지 친구들은 선배가 알아서 찾아오겠지, 하며 먼저 한국식당을 찾아서 들어갔다. 하지만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선배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기다리다 지친 부장님과 친구들은 더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다시 차를 타고 그랜드 정션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 드디어 선배가 학교에 모습을 드러냈다. 부장님과 친구들은 선배에게 왜 식당에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고, 선배는 라스베이거스를 헤매다 헤매다 결국 한국 식당을 못찾아 그냥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고 대답했다. 부장님이 “그럼 한국 음식도 못 먹고 뭐 먹었냐”고 묻자 그 선배는 멋쩍은 표정으로 “맥도날드를 사먹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부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그냥 웃음으로 넘겨버리기에는 그 선배의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한국 음식을 먹겠다는 일념 하에 왕복 10시간도 넘는 거리를 운전해서 가서 먹은 것이 고작 맥도날드라니… 맥도날드는 그랜드 정션에서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던가…
우리네 인생도 이런 일이 많다. 무언가 하겠다는 각오로 처음은 호기있게 시작하지만, 결국 끝은 흐지부지 끝나고 마는 용두사미 스타일 말이다. 하지만 나는 용두사미라도 좋으니 일단 시작을 해보는 배짱이 좋다. 누구도 죽음이 맨 마지막이라는 것 외에는 인생의 끝을 알수가 없다. 처음에 금숟가락 물고 태어나더라도 가산을 탕진해 결국 거적때기 위에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고, 가진 거 하나 없는 부모에게서조차 버림받아 고아로 자라더라도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해 존경받으며 살다가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미리 겁먹고 도전하지 않는다면 그런 소심한 인생은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끝나게 된다. 하지만,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일단 앞뒤 가리지 않고 도전해보는 무모함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극이 될 수 있다. 성공? 할 수 있다. 실패? 그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좋다면, 그래서 한번 해보고 싶다면, 한번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부장님의 선배도 라스베이거스까지 힘들게 운전해서 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중에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재미있는 추억거리 하나를 만들지 않았는가. 기왕 떠난거 여행 기분도 냈을 것이고, 라스베이거스에서 만드는 맥도날드 햄버거가 다른 곳과 다른지 비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용두사미에 대한 해석을 바꾸어보자. 뱀꼬리가 되더라도, 최소한 ‘간지’나는 용머리가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