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좋아하십니까?

2011-09-01     이하린 기자

 엄마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엄마가 어린 딸들을 앉혀놓고 전설의 고향 이야기를 시작하면 우리들은 넋을 잃고 엄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과거를 가던 선비가 어둑어둑해져 가는 저녁 무렵 갑자기 내린 비로 산속에서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면 그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지면서 안타까움에 우산을 들고 뛰어가고 싶었고, 음산한 기와집을 발견해 그 안으로 들어가는 선비의 발목을 잡고 싶었다. 아리따운 과부가 저녁상을 내오면서 선비가 밥그릇을 열자 그 안에서 밥 대신 머리카락이 소복하게 들어있었고, 국이 흥건한 핏물로 바뀌면 우리는 꺄악, 비명을 질렀다. 천신만고 끝에 귀신을 물리치고 아침이 밝아오면 우리는 콩닥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며, 과거에 급제해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는 중에 그 기와집 근처를 지나는데, 기와집 대신 허물어져가는 무덤 하나가 있었다는 말로 끝을 맺으면 오싹 소름이 돋았다. 

 엄마는 때로는 음산한 목소리로 귀신의 하이톤 웃음소리도 내고, 바람 소리, 까마귀 소리 등 혼자서 온갖 음향효과를 모두 담당했으며, 이야기의 속도도 적절하게 조절하며 우리들을 까마득한 옛날 속으로 이끌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전에 보았던 ‘검사와 여선생’이나 신성일이 나왔던 영화 이야기를 마치 변사가 된 듯 박진감있게 해주며 우리를 눈물짓게 했으며,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우리는 포복절도하며 즐거워했다.  엄마는 지금도 이야기를 참 잘한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도 어쩜 그렇게 맛깔스럽게 얘기를 하는지 감탄이 절로 나올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세월은 흘러흘러 나도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아이들이 자기 전에 내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책을 읽어주기가 귀찮아서 대충 러시아와 유럽에서 떠도는 민화 비슷한 얘기 하나를 지어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병에 걸린 공주를 살릴 약을 구하기 위해 3형제가 각자 길을 떠난다. 바보 취급을 받던 막내 아들은 길에 쓰러진 노파에게 자신의 말라 비틀어진 빵과 물을 나누어주고 3가지 선물을 받는다. 빨간병, 파란병, 흰병에는 각각 위험으로부터 그를 구해줄 비책이 숨겨져 있었다. 결국 막내 아들은 약으로 쓸 황금용의 비늘 하나를 얻어올 수 있게 되고, 그는 공주를 살리게 되는데…

 이야기는 여기서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한다. 막내 아들은 공주와 결혼해 행복하게 산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느 왕이 무지랭이 농부에게 귀한 공주를 주겠는가. 차라리 포상금을 잔뜩 주지… 그래서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왕은 공주를 주기 싫었다. 그래서 다시 막내아들에게 어려운 3가지 임무를 맡긴다. 첫번째는 바다밑에 잠들어있는 전설의 반지를 찾아오기, 그는 바닷물을 모두 마셔준 거인의 도움으로 반지를 찾는데 성공한다. 두번째는 유리산 꼭대기에 놓인 혼자서 연주하는 마법의 비파를 찾아와야 한다. 미끄러운 유리산을 오르는 대신 그는 자신이 목숨을 살려준 큰 독수리의 등을 타고 비파를 찾아온다. 마지막 임무는 미래를 볼 수 있는 수정구슬을 지하세계에서 찾아와야 한다. 천신만고끝에 지하세계에 도착한 막내아들은, 이제 임금이 자신에게 딸을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임금이 절대 미래를 보아서는 안된다고 당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정구슬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엿본다. 그는 교수형을 당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왕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 동화에는 잔인한 피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나는 스스로의 이야기에 도취되어 막내 아들에게 힘을 불어넣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한다. 그는 지하세계의 악마와 친구가 되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갑옷과 무엇이든 자를 수 있는 칼을 손에 넣게 된다. 이제 이 칼로 왕의 목을 단칼에 자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진 이야기에 지친 아이들이 벌써 잠들어 있었다.  막내 아들의 피비린내나는 복수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우리 엄마가 얘기할 때는 중간에 잠든 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나는 엄마의 이야기꾼 재능을 100% 물려받진 못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