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달인

2025-09-19     weeklyfocus

필자가 한국의 방송 프로그램 중 유독 즐겨보는 것이 ‘생활의 달인’이다. 이 프로그램이 벌써 1,000회를 맞았다고 한다. 2005년 4월 ‘이삿짐 달인’을 시작으로 출발한 ‘생활의 달인’은 지난 20년간 6,300여 명의 달인을 발굴하며 평범하지만 특별한 기술과 삶의 이야기를 전해왔다. 특히 출연자들에게는 직업적 자부심을 되찾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필자가 이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한 기술 과시가 아니라, 달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노력과 인생 이야기가 함께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을 계기로 “무언가를 잘하는 사람”을 뜻하는 ‘달인’이라는 표현은 일상 속으로 퍼져나가며 대중문화의 상징어로 자리 잡았다. 나아가 각종 개그 프로그램과 패러디 콘텐츠에 활용되며 문화적 현장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천 회 특집에는 전설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신문 배달의 달인은 매일 새벽 거리를 누비며 수천 부의 신문을 정확하고 신속하게 배달하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빠른 손놀림과 배달 거리 감각은 단순한 일이 아닌 하나의 기술임을 입증했다. 우체국 달인은 우편물을 빠르고 정확하게 분류하는 솜씨로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수많은 우편물을 단 몇 초 만에 찾아내는 집중력과 기억력 덕분에 ‘인간 분류기’라는 별명을 얻었다. ‘못 먹는 수선 달인’은 기상천외한 수선 실력으로 화제를 모았다. 손상된 물건과 굽이 나간 신발을 마치 새것처럼 복원해낸 그는 못을 입에 물고 있다가 필요할 때 빼서 사용하는 버릇 때문에 독특한 별칭을 얻었다. ‘돈 세기 달인’은 은행원으로, 은행에서 단련된 놀라운 집중력과 속도로 돈을 세는 장면은 압도적이었다. 이외에도 무엇이든 해결하는 ‘만물상 박사’, 강철같은 팔로 전국 대회를 휩쓴 팔씨름 달인, 불가능해 보이는 퍼즐을 순식간에 맞추는 큐브 달인, 가구와 짐을 순식간에 옮기는 이사 달인, 수십 킬로그램 짐을 지고 설악산을 오르내리는 지게꾼 달인, 암 투병 중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은 턱걸이 달인, 다양한 지퍼 종류를 구비해 고객이 원하는 색상과 질감을 맞춰주는 지퍼 수선의 달인 등 다양한 달인들이 감동을 주었다.

한때 청와대 홈페이지에 한국을 일으킨 생활의 달인들이 소개된 적이 있었다. 홈페이지에는‘한국 선진화의 초석’을 다진 이들을 조명하면서, 외국에서 공부한 박사들이 아니라 서민의 현장에서 찾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오토바이를 타고 고층 아파트 문 앞에 정확히 신문을 던져 넣는 장면, 음식이 가득한 쟁반을 이고 혼잡한 남대문시장을 아슬아슬하게 누비는 모습, 대형 빈 생수통 15개를 맨손으로 수거해 내는 장면들을 보면 절로 탄성이 나온다.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일을 거뜬히 해내고 씩 웃는 모습이 아름답다.
‘생활의 달인’이 보여주는 경지는 속도와 정확성에 있다. 그 미세한 차이가 범인과 달인을 가른다.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니다. 끊임없는 반복과 경험, 일에 대한 흥미와 자부심이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일에 전념하다가 막히면 궁리 끝에 터득해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생활의 달인들이 습득한 방법은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 정석이다. 이러한 달인들이야말로 국가 경쟁력을 만들어왔다.

현대중공업이 맨땅에서 배를 만들었을 때, 조선업계는 ‘용광로 없이 쇳물을 제조하는 격’이라며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선박은 반드시 도크에서 건조한다는 통념을 깨뜨린 역발상이었다. 삼성중공업은 바다에 바지선을 띄워 배를 만드는 ‘플로팅 도크’ 공법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주문은 쏟아지는데 도크가 부족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수없이 시도한 끝에 얻어낸 성과였다. 육지나 바다 어디서든 자유자재로 배를 만들어내는 한국의 조선 기술은 가히 달인의 경지다. 컴퓨터, 텔레비전, 전화기 시장도 이미 세계를 장악한 지 오래다. 이처럼 ‘산업의 달인’들이 대한민국을 버텨주는 경쟁력이 되었다.
 한국 전쟁 이후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 경제적으로 빠르게 성장하여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하나로 꼽혔고, 오늘날 K-푸드와 K-컬처는 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콘텐츠로 부상하고 있다.

덴버에도 생활의 달인이 많다. 불황에도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비즈니스를 이어가는 경영의 달인, 고기·쌀·밀가루·채소 가격 폭등 속에서도 고민 끝에 장사를 지켜내는 한인 업체들은 이민사회의 달인이라 할 만하다. 봉사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봉사의 달인, 자녀 교육에 헌신하는 교육자와 부모 또한 그렇다. 그러나 이민 생활 속에서 한인 사회가 대접받지 못한다는 억울함이 밀려올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더이상 50여년 전 가난했던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경기가 어려울수록 똘똘 뭉쳐 ‘코리안 커뮤니티는 불경기 속에서도 굳건하다’는 이미지를 함께 만들어가자. 의사, 요리사, 자동차 정비사, 융자 전문가, 세탁업자, 리얼터 등 우리 주변의 달인들에게 아낌없는 칭찬과 응원을 보내자. 살아가면서 자기만의 비법과 방법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민 사회에서는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달인의 지혜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이겨낼 때, 우리 모두가 진정한 ‘생활의 달인’이 되는 것 아닐까.                                 
<발행인 김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