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는 환영, 인력은 차단
지난 주 조지아주 현대차 · LG 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에서 300여 명의 한국인 직원과 기술자들이 체포됐다. 미 역사상 단일 사업장으로는 최대 규모의 단속이었다. 마치 중범죄자를 다루듯 손발이 결박된 채 군용 차량과 헬리콥터까지 동원되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동맹국 기업이 수 천억 달러를 투자해 경제에 기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당국은 신뢰를 무너뜨리는 군사 작전식 단속을 감행한 것이다. 다행히도 사태 5일만에 한·미 정부 협상으로 구금자 전원이 전세기를 통해 귀국한다지만, 이번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이라고 치부할 수준이 아니다. 이는 분명 미국이 외치는 ‘제조업 르네상스’와 ‘불법 이민 단속’이라는 두 기조가 충돌하면서 드러난 구조적 모순을 상징한다.
“한국으로부터 대규모 투자를 미국으로 유치했다고 자랑하더니, 돌아서서는 현대차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임시로 미국에 온 한국인들을 체포했다. 어리석음은 화를 부른다(stupidity burns).” 미국의 경제 전문 저널리스트 제임스 수로위에키는 지난 4일 이민세관단속국(ICE)의 조지아주 현대차·LG 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 급습 이후 소셜미디어에 이렇게 썼다. 미국의 해외 투자 유치와 인력 정책 사이의 모순을 집약한 비판이었다. 환영과 단속이 불과 하루 간격으로 엇갈린 것이다. 태미 오버비 전 미국 상공회의소 아시아 담당 부회장도 “돈은 원하지만 사람은 원치 않는다”는 신호를 전 세계에 보낸 셈이라고 트럼프 행정부를 비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몇 달 전 정의선 현대차 회장을 백악관에 초청해 이 공장에 대한 투자에 감사 인사를 했었다. 2주 전 방미한 이재명 대통령도 3,500억달러 투자 펀드에다 추가로 미국에 1,500억달러 규모 공장을 짓겠다는 약속을 내놓았다. 미측의 ‘제조업 부활’ 정책에 한국 정부·기업이 호응하고 있는데도 이런 일이 벌어지니 황망할 뿐이다.
트럼프는 외국 기업들에게 수십조 원 규모의 미국 내 투자를 요구하면서 미국 제조업 부활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정작 그 공장을 세우고 운영할 숙련 인력을 확보해야하는 현실은 외면하고 있다. 대규모 첨단 공장을 건설하려면 현장 기술 전수가 필수인데, 미국은 취업 비자 발급을 까다롭게 하거나 지연시켜 사실상 전문 인력 유입을 차단하고 있다. 결국 기업들은 공기를 맞추기 위해 임시 비자나 ESTA를 활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몰리게 되고, 이번 대규모 체포 사태로 이어졌다.
이번에 체포된 한국인 대부분은 전자여행허가(ESTA)나 단기 상용(B1) 비자를 받고 미국에 입국한 것으로 전해졌다. ESTA는 미국에 일시적으로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증서다. B1 비자는 미국 내 비즈니스 회의나 계약, 세미나 방문 시 최대 6개월간 체류를 허가하는 방문 비자로 미국에서 노동 혹은 수익 활동을 할 수 없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 숙련된 인력을 구하기 힘든 상황에서 미 당국이 취업 비자를 제때 내주지 않기 때문에, 해외 기업은 어쩔 수 없이 편법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은 단순히 이민 행정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은 이미 미국의 전략적 요구에 발맞추어 전기차, 배터리, 반도체 등 핵심 산업에 대규모 투자를 약속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과 같은 무자비한 단속은 동맹국으로서의 신의를 저버린 처사다. 특히 바이든 행정부 시절 약속했던 전기차 보조금을 일방적으로 철회한 데 이어, 트럼프 행정부는 불과 몇 달 만에 동맹국 인력을 대규모 체포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쯤 되면 한국 기업들이 “미국이 말하는 동맹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불행 중 다행히 단속 사흘 만에 구금자 석방이 타결되었지만, 여기서 사건을 봉합해서는 안 된다. 한국 정부는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재발 방지 장치를 미국 측에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 원활한 비자 발급 절차 마련, 숙련 인력 교류 협정 체결, 투자 안정성 보장 등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 동시에 기업들 역시 교훈을 얻어야 한다. 투자 결정 시 단순한 경제적 요인뿐 아니라 정치적 리스크, 특히 미국 내 정권 교체에 따른 정책 변동 가능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대만 등 다른 나라들도 미국 내 공장을 짓고 있지만, 한국 기업들만 표적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트럼프 행정부는 대미 투자 증액을 요청하면서도 해외 전문인력 입국에 필요한 비자 발급 관문을 좁혔다. 이 딜레마는 최근의 정책 흐름에서도 드러난다. 트럼프가 관세를 앞세워 해외 기업들의 미국 투자를 연일 압박하는 와중에, 국토안보부(DHS)는 지난달 28일 외국인 학생·연구자의 체류 기간을 최대 4년으로 제한하고, 전문 인력 비자 심사도 까다롭게 바꾸는 정책을 발표했다. 비자 승인 지연으로 실리콘밸리 기업들조차 숙련 인재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박사 과정이나 첨단 연구 프로젝트처럼 장기간 체류가 필요한 경우엔 사실상 발목이 잡히는 셈이다. 실리콘밸리 기술 인력의 3분의 2가 외국 국적인 현실을 고려하면 이는 산업 혁신을 저해한다는 지적이다. 한국 정부와 기업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제시하는 ‘동맹’과 ‘투자 약속’이 실제로 얼마나 지속 가능하고 신뢰할 만한지 냉정히 따져야 한다. 동맹은 일방적 희생이 아니라 상호 존중과 신뢰 위에 세워져야 한다. 이번 사건은 그 기본을 다시 묻는 경고음이다.
<발행인 김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