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난한 출발, 남은 과제
이재명 대통령이 25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첫 한·미 정상회담을 무난히 마쳤다. 이번 만남은 ‘국익중심 실용외교’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를 수 있는 최대 시험대로 여겨졌다는 점에서, 조심스러운 안도와 함께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회담시간이 30분 정도 지연되었고, 회담 직전까지 불거졌던 ‘돌발 상황’우려와는 달리, 이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첫 대면에서 큰 마찰 없이 외교 무대를 통과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요 쟁점들이 본격적으로 협상 테이블에 오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진짜 청구서는 아직 남아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 날 정상회담 직전까지 분위기는 순탄치 않았다. 조현 외교부 장관과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이 미국으로 향하면서 준비 과정에 이상기류가 감지된다는 관측이 돌았다. 더구나 미국 측이 3,500억 달러 규모 투자 패키지의 구성 문제와 농축산물 개방 확대를 요구한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통상 분야의 난항이 예견됐다.
안보 측면에서도 미국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확대와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압박할 수 있다는 전망이 제기됐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통령이 회담을 무난히 마쳤다는 사실만으로도 ‘잡음 없는 통과’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이 “양국 정상이 공감대를 확인하고 이의 없이 끝났다는 것 자체가 성공”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러나 회담의‘조용한 마무리’를 곧바로‘성공’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이번 회담은 우호적 분위기와 친밀감 형성에 집중했을 뿐, 관세 협상·동맹 현대화·방위비 증액 등 본질적 현안은 의도적으로 미뤄졌다. 실제로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은 “미국은 시장 개방을 원한다”며 농축산물 문제를 직접 언급했다. 이는 향후 실무 협상 과정에서 한국이 쉽지 않은 줄다리기를 이어가야 함을 의미한다. 국익을 지키면서도 동맹의 균열을 피해야 하는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국익중심 실용외교’라는 원칙이 구호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러한 청구서를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관건이 된다.
이번 방문 중 또 다른 의미는 이 대통령이 처음으로 국방비 증액 의사를 공개적으로 천명했다는 점이다. 워싱턴 DC의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연설에서 이 대통령은 “한국은 보다 주도적인 역할을 하겠다”며 국방비를 늘리겠다고 밝혔다. 이는 그동안 미국이 지속적으로 요구해온 사항이자, 나토 수준의 방위비 지출을 요구받아온 한국이 더 이상 회피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이 대통령은 늘어난 국방비가“첨단 과학기술 도입과 스마트 강군 육성”에 쓰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한·미동맹의 ‘현대화’라는 큰 틀 속에서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있다. 그러나 GDP 대비 어느 정도까지 증액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목표치가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국 내 정치적 부담과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번 회담 중 흥미로운 장면도 연출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대통령에게 APEC 참석을 환영하면서, 김정은 위원장이나 시진핑 주석과의 만남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적극적으로 김정은과의 대화를 권유하며 “추진하겠다”는 답을 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이 대통령이 자신을 ‘페이스 메이커’, 트럼프를 ‘피스 메이커’에 비유한 대목은 과거 문재인 전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자론’보다 훨씬 현실주의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로 읽힌다. 동아시아 안보 지형에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게 하지만, 동시에 북한과 중국의 호응이 불확실하다는 점은 분명한 한계다.
그리고 이번 회담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작은 장면들이 큰 상징성을 남겼다. 백악관에서 열린 서명식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 대통령이 방명록 앞에 편하게 설 수 있도록 직접 의자를 빼 주었다. 형식과 격식을 중시하는 외교 무대에서 보기 드문 제스처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 대통령의 한국어 서명을 바라보며 “아주 아름답게 쓰셨다”라며 언어와 글씨체까지 화제로 삼은 것도 일종의 친근한 교감이었다. 특히 이 대통령이 사용한 만년필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연신 “좋다(nice)”를 반복하며 관심을 보였고, 이 대통령이 웃으며 “한국에서 만든 것”이라며 선뜻 선물한 장면은 두 정상의 친밀감이 형성되는 접점을 보여주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사용하지는 않겠지만 아주 영광스럽게 간직하겠다”고 화답한 장면도, 실리 중심의 대화 속에서도 인간적인 교류가 외교의 또 다른 자산이 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결국 이런 디테일은 정책적 쟁점의 무거움을 잠시 덜어내고, 양 정상 간 신뢰를 형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큰 충돌 없이 ‘잡음 없는 통과’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본질적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고, 실질적인 국익 확보는 앞으로의 협상에서 판가름 날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강조한 국익중심 실용외교는 이제 구호를 넘어 실질적 시험대로 들어섰다. 한국은 동맹의 무게를 짊어지면서도, 자국의 경제·안보적 이익을 극대화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 앞에 서 있다. 잡음 없는 출발은 분명 의미 있는 성과지만, 진짜 시험대는 지금부터다.
<발행인 김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