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 망신, 즐길 일이 아니다
최근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서울구치소에서 ‘김건희 특검팀’의 체포영장 집행에 불응하며 벌어진 사태는 불과 몇 시간 만에 전 세계 언론에 보도됐다. 로이터는 “러닝셔츠와 속옷만 입었다”고 전했고, AFP는 “속옷 색상에 대한 정보는 없다”고, AP는 “새로운 저항 방식”이라고 보도하며 전직 한국 대통령의 이례적인 모습을 전했다.
지난 1일, 김건희 여사 관련 의혹을 수사하는 민중기 특별검사팀이 공천 개입 등 혐의를 받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체포영장 집행을 시도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특검팀은 서울구치소를 찾아 2시간 동안 네 차례 영장 집행에 응할 것을 요구했지만, 윤 전 대통령은 완강히 저항했다. 심지어 수의를 벗고 속옷 차림으로 바닥에 누운 채 협조 의사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특검은 다음번엔 물리력을 행사해서라도 집행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전직 대통령이 구속된 것도 모자라, 구치소에서 속옷 차림으로 체포영장 집행에 불응한 장면은 민망함을 넘어 국가적 망신이었다.
법률적으로 보더라도 명분은 없다. 법원이 발부한 적법한 체포영장에 불응한 것은 법치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피의자는 진술 거부권을 가질 수 있지만, 조사 자체를 무조건 거부할 수는 없다. 검찰총장 출신으로 누구보다 법의 절차를 잘 아는 윤 전 대통령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공권력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정치적 부담만 키울 것이다.
그러나 특검팀의 대응과 브리핑 방식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특검은 윤 전 대통령의 속옷 차림과 행동을 세세하게 언론에 알렸다. 그 직후 외신은 일제히 이 장면을 전하며 한국을 조롱했다. 검색창에는 ‘Korea(한국)’, ‘Former President(전직 대통령)’, ‘underwear(속옷)’가 나란히 올라왔다. 행간에는 우월감 섞인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국가적 수치가 한순간에 세계로 퍼져나간 것이다.
문제는 국내 정치권의 반응에도 있다. 일부 친여 진영에서는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한 반응이 나왔다. AI로 전직 대통령의 합성 사진을 만들어 돌리며 낄낄거리고, 유튜브에서는 “다음에는 이불을 씌워서라도 보쌈해 나오자”는 조롱까지 등장했다. 국격이 훼손되는 장면 앞에서 손뼉을 치는 모습은 참으로 민망하다. 국제 망신은 남의 불행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 모두의 얼굴에 먹칠하는 일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전직 대통령들은 피의자 신분으로 법 앞에 섰을 때 최소한의 품위는 지켰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은 파면 11일 만에 검찰에 출석하며 “국민께 송구하다. 성실히 조사에 임하겠다”고 말했다. 그 무더위에도 긴팔 재킷과 바지를 입고 법정을 오갔다. 이명박 전 대통령 역시 구속 전후 일관되게 “국민께 죄송하다”는 말을 남겼다. 노태우·노무현 전 대통령도 피의자 신분에 처했지만, 국가의 체면을 의식한 최소한의 언행으로 기록됐다. 그들은 개인의 수모를 감내하면서도 국격을 지키려 했다. 반면 이번 사태는 달랐다. 윤 전 대통령은 수감 중 영장 집행을 거부하며 인권과 권리를 선택했지만, 그 순간 전직 국가원수로서의 책임은 내려놓은 셈이 됐다. 한 개인의 치욕이 곧 국가의 수치가 되고, 국민의 부끄러움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것은 미국의 사례다. 자유언론의 나라로 알려진 미국도 국가적 위신과 국격을 지키기 위해 언론을 통제하거나 자율 검열을 유도한 적이 많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정부는 전시 정보국과 검열국을 두고 전사자 사진, 작전 위치, 해군 이동을 통제했다. 진주만 공습 피해 장면은 사기 진작과 체면을 지키기 위해 상당 기간 비공개였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초기에도 미군은 전황 악화 장면과 포로 사진 보도를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고, 언론은 이에 협조했다.
전시 상황이 아니어도 국격을 위한 ‘침묵’은 있었다.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휠체어를 사용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모습은 재임 중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냉전기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사생활과 건강 문제도 언론은 사실상 침묵했다. 지도자의 권위와 국가의 체면을 위한 ‘자율적 절제’였다.
물론 지금 한국에서 이러한 언론 통제를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사건은 분명한 교훈을 남긴다. 설령 내부적으로 불편하고 싫어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국가의 이익과 품격을 위해 발설하지 않고 삼가야 할 말이 있다. 국격은 경제 지표나 외교 성과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치욕 앞에서도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려는 태도, 남의 불행을 함부로 즐기지 않는 절제 속에서 세워진다. 국제적 망신은 즐길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함께 부끄러워하고, 다시는 같은 길을 걷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그것이 국격을 지키는 최소한의 책임이며, 국가적 품격을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동방예의지국, 작은 선비의 나라최근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서울구치소에서 ‘김건희 특검팀’의 체포영장 집행에 불응하며 벌어진 사태는 불과 몇 시간 만에 전 세계 언론에 보도됐다. 로이터는 “러닝셔츠와 속옷만 입었다”고 전했고, AFP는 “속옷 색상에 대한 정보는 없다”고, AP는 “새로운 저항 방식”이라고 보도하며 전직 한국 대통령의 이례적인 모습을 전했다.
지난 1일, 김건희 여사 관련 의혹을 수사하는 민중기 특별검사팀이 공천 개입 등 혐의를 받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체포영장 집행을 시도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특검팀은 서울구치소를 찾아 2시간 동안 네 차례 영장 집행에 응할 것을 요구했지만, 윤 전 대통령은 완강히 저항했다. 심지어 수의를 벗고 속옷 차림으로 바닥에 누운 채 협조 의사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특검은 다음번엔 물리력을 행사해서라도 집행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전직 대통령이 구속된 것도 모자라, 구치소에서 속옷 차림으로 체포영장 집행에 불응한 장면은 민망함을 넘어 국가적 망신이었다.
법률적으로 보더라도 명분은 없다. 법원이 발부한 적법한 체포영장에 불응한 것은 법치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피의자는 진술 거부권을 가질 수 있지만, 조사 자체를 무조건 거부할 수는 없다. 검찰총장 출신으로 누구보다 법의 절차를 잘 아는 윤 전 대통령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공권력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정치적 부담만 키울 것이다.
그러나 특검팀의 대응과 브리핑 방식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특검은 윤 전 대통령의 속옷 차림과 행동을 세세하게 언론에 알렸다. 그 직후 외신은 일제히 이 장면을 전하며 한국을 조롱했다. 검색창에는 ‘Korea(한국)’, ‘Former President(전직 대통령)’, ‘underwear(속옷)’가 나란히 올라왔다. 행간에는 우월감 섞인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국가적 수치가 한순간에 세계로 퍼져나간 것이다.
문제는 국내 정치권의 반응에도 있다. 일부 친여 진영에서는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한 반응이 나왔다. AI로 전직 대통령의 합성 사진을 만들어 돌리며 낄낄거리고, 유튜브에서는 “다음에는 이불을 씌워서라도 보쌈해 나오자”는 조롱까지 등장했다. 국격이 훼손되는 장면 앞에서 손뼉을 치는 모습은 참으로 민망하다. 국제 망신은 남의 불행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 모두의 얼굴에 먹칠하는 일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전직 대통령들은 피의자 신분으로 법 앞에 섰을 때 최소한의 품위는 지켰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은 파면 11일 만에 검찰에 출석하며 “국민께 송구하다. 성실히 조사에 임하겠다”고 말했다. 그 무더위에도 긴팔 재킷과 바지를 입고 법정을 오갔다. 이명박 전 대통령 역시 구속 전후 일관되게 “국민께 죄송하다”는 말을 남겼다. 노태우·노무현 전 대통령도 피의자 신분에 처했지만, 국가의 체면을 의식한 최소한의 언행으로 기록됐다. 그들은 개인의 수모를 감내하면서도 국격을 지키려 했다. 반면 이번 사태는 달랐다. 윤 전 대통령은 수감 중 영장 집행을 거부하며 인권과 권리를 선택했지만, 그 순간 전직 국가원수로서의 책임은 내려놓은 셈이 됐다. 한 개인의 치욕이 곧 국가의 수치가 되고, 국민의 부끄러움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것은 미국의 사례다. 자유언론의 나라로 알려진 미국도 국가적 위신과 국격을 지키기 위해 언론을 통제하거나 자율 검열을 유도한 적이 많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정부는 전시 정보국과 검열국을 두고 전사자 사진, 작전 위치, 해군 이동을 통제했다. 진주만 공습 피해 장면은 사기 진작과 체면을 지키기 위해 상당 기간 비공개였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초기에도 미군은 전황 악화 장면과 포로 사진 보도를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고, 언론은 이에 협조했다.
전시 상황이 아니어도 국격을 위한 ‘침묵’은 있었다.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휠체어를 사용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모습은 재임 중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냉전기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사생활과 건강 문제도 언론은 사실상 침묵했다. 지도자의 권위와 국가의 체면을 위한 ‘자율적 절제’였다.
물론 지금 한국에서 이러한 언론 통제를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사건은 분명한 교훈을 남긴다. 설령 내부적으로 불편하고 싫어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국가의 이익과 품격을 위해 발설하지 않고 삼가야 할 말이 있다. 국격은 경제 지표나 외교 성과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치욕 앞에서도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려는 태도, 남의 불행을 함부로 즐기지 않는 절제 속에서 세워진다. 국제적 망신은 즐길 일이 아니다. 함께 부끄러워하고, 다시는 같은 길을 걷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승화시킬 때 비로소 국가적 품격을 지킬 수 있다. 이는 수천 년 동안 동방예의지국의 명예를 지켜온 선비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발행인 김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