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 만난 어느 노부부의 민낯

2025-07-04     weeklyfocus

한국에서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영화가 마침 오로라의 아라파호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반가운 마음에 두 아들을 설득해 지난 주 목요일 아침, 부랴부랴 예매를 하고 극장을 찾았다. 상영 첫 주이기도 하고 한국 영화라는 기대감에 관객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영화관 안은 썰렁했다. 우리 셋을 포함해 총 여섯 명. 70대로 보이는 노부부, 혼자 온 남성 한 명이 전부였다. 그 자체로는 매우 조용하고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영화 시작 10분 만에 급변했다.

우리 바로 앞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를 받은 것이다.  마치 자신의 집 거실에서 통화하듯이 “나 영화 보러 왔어. 잘 지냈어?”등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영화의 몰입감은 단숨에 깨졌고, 우리 셋은 당황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계속 이어지는 할머니의 전화 통화에 나는 참다못해 조심스레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손가락으로 통화 자제를 부탁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큰소리로“전화 와서 받은 건데, 그게 뭐가 잘못됐어?” 무례함에 놀랐고, 당당함에 더 놀랐다. 그래도 아이들 앞에서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해달라는 손짓만 다시 한 번 했다. 

그 노부부는 잠깐 잠잠해지는가 싶었지만, 영화 내내 뒤를 돌아 우리를 노려보았다. 마치 우리가 큰 잘못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며칠 뒤 예상치 못한 재회가 있었다. 일요일에 가족들과 한인 마트를 찾았다가 그 노부부와 또 마주친 것이다. 우리를 알아보고 계속해서 노려보았다. 잠깐 마주친 눈빛 속에도 여전히 불쾌감이 묻어 있었고, 우리는 피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저 할아버지는 왜 저렇게 우리를 노려보는거야?”라고 물었지만, 쉽게 설명할 수 없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설명하려다 보니 오히려 내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날, 나는 한국 어른으로서 부끄러웠다. 우리는 이미 영화관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걸 알고 있다. 상대방의 잘못된 행동을 조용히 지적했음에도, 사과는커녕 오히려 역정을 내며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하는 한국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이 일이 단순히 불쾌한 해프닝이 아니라, 우리 어른 세대가 아이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만든 사건이었다. 어른이라는 이름 아래 예의와 반성을 내려놓고 저리 당당하다니 말이다.  
 미국 사람들뿐 아니라 대부분 영화를 보러 온사람들은 영화 상영 중간에 전화를 받는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전화기를 무음 혹은 꺼달라는 공지가 본영화 전에 나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급한 전화가 오면 밖으로 나가서 통화를 한다든지, 문자로 대신하는 것이 기본 에티켓이거늘.  응급 내용도 아니고, 친구와의 잡담을 영화 상영 중간에 경우는 처음봤다.

극장은 단지 영화만 보는 곳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지친 몸을 쉬기 위해, 어떤 사람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즉 일상 속에서 힐링을 하고 싶어 영화관을 찾는다. 영화 시작 전 ‘핸드폰을 꺼주세요’라는 자막은 단순한 알림이 아닌, 모두가 함께 지켜야 할 약속이다. 어쩔 수 없는 급한 전화가 온다면 나가서 받는 것이 기본이고, 짧고 낮은 목소리로 통화를 마무리하는 것이 기본 예의다. 그런데 이를 모른 척하거나, “그게 뭐 어때서?”라고 되묻는 태도는 단지 예절 부족을 넘어서, 사회적 공간에서 함께 어울릴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영화관은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 그리고 만약 이 노부부가 미국 사람들에게 지적을 받았다면, 미국 사람들을 끝까지 노려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러한 모습은 극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인 식당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반복된다. 한식당을 경영하는 사장님들의 목소리를 종합해보면, 한국 손님들이 가장 까다롭다. ‘음식이 너무 늦게 나온다, 반찬이 조금이다, 국이 짜다, 자주 오는데 서비스는 없느냐, 웨이츄레스를 세번이나 불렀는데 안왔다, 김치가 너무 시었다’면서 웨이터를 불러세워 일일이 말한다. 그리고는 자주 식당에 온다는 이유로, 그 식당을 먹여살린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진상을 부린 사람들이 미국 레스토랑에 가면 어떻게 변할까? 음식이 늦게 나온다고, 스테이크가 탔다고, 감자가 짜다고, 웨이터가 자주 오지 않는다고 과연 불만을 표할 수 있을까? 

이처럼 왜 같은 사람인데 대상이 바뀌면 태도가 달라질까. 외국인에게는 예의를 갖추고, 동포에게는 권리를 주장한다면, 그 예의는 진짜가 아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른들께 인사 잘하고, 예의를 지켜라”고 가르치지만, 정작 어른들은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면죄부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미국에 살면서, 같은 민족이 부끄러운 행동을 하는 것에 매우 민감하다. 영화관에서 조용히 영화를 보는 것이 왜 당연한 일인지, 식당에서 어떻게 서로를 배려해야 하는지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예의와 배려는 국적을 넘어선 인간의 기본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것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양보하고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잘못을 했으면 먼저 사과하는 것이 순서다. 하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눈빛으로 상대를 윽박지르려는 태도는 오히려 유치하게 보일 뿐이다. 물론 모든 어른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어른’이라는 이름이 존중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어야 한다는 점을 되새겨보면 좋겠다.        
<발행인 김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