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뜻이면 - Deo Volente”

2025-06-27     weeklyfocus

신약 야고보서에 보면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야고보서4:15). 여기 ‘도리어’로 번역된 헬라어 ‘안티’는 ‘∼에 대항하여’ ‘∼에 반대하여’라는 뜻으로 앞의 내용과 대조 대는 내용을 언급할 때 주로 사용합니다. 앞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잘못된 인생관에 근거하여 인생을 교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인생의 주인 노릇을 자신이 하려고 합니다. 내일 일도 모르면서 일 년 후를 장담합니다. 안개처럼 사라져버릴 인생인 것을 모르고 마치 천년만년 살 것처럼 행동합니다. 야고보는 이런 잘못된 인생관을 교정시키기 위해, 내 생명과 내 삶에 ‘주의 뜻이면’을 개입시켜야 한다고 교훈합니다. 

여기서 ‘주의 뜻이면’이라는 구절을 원문에 가깝게 직역하면 ‘주께서 만약 원하시면’이 됩니다. 라틴어로는 ‘데오 볼렌테’(Deo Volente)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서신 왕래를 할 때 편지에 ‘D.V’라는 이니셜 문자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Deo Volente’의 약자입니다. 이런 ‘데오 볼렌테’의 신앙을 이어받은 네덜란드의 개혁교회에서는 지금도 교회에서 공적인 광고를 할 때 “주께서 원하시면 이번 주 토요일에 누구와 누가 결혼할 것입니다.”라고 광고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계획하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렸다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러면 내 인생관에 ‘주의 뜻’을 개입시켜 교만한 인생이 아니라 겸손한 인생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첫째, 내 생명과 내 삶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언급하고 있는 앞의 이 문장에는 하나님의 뜻과 관련하여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살기도하고’입니다. 즉 우리의 ‘생명’이(살고 죽는 것이) 주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내 생명의 주인이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입니다. 즉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주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우리를 인도해 주셔야 내가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이 잘 됩니다. 그러니 철저하게 하나님 의지하고, 기도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 주님의 뜻 앞에 허탄한 자랑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야고보서4:16). ‘허탄한 자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라조네이아이스’는, 일반적으로 자신을 지나치게 신뢰하거나 과대평가하는 ‘오만’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의 자랑이 왜 오만한 것입니까? 미래에 대한 계획, 내일에 대한 장담 속에 하나님을 배제시킨 그들의 태도 때문입니다. 왜 허탄한 것입니까?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내일 일도 모르고, 자신을 알지도 못하고 하는 장담이기에 허탄한 것입니다.

왜 이런 허탄한 자랑이 악합니까? 주님의 뜻을 생각지 않고 주님을 무시하는 자랑이니 악한 것입니다. 마치 자기 인생과 미래가 자기 손 안에 있는 것처럼 여기는 오만이 이들의 자랑 속에 숨어 있기에 악한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잘 되고 못되는 것, 이루어지고 못 이루어지는 것,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 이 모든 것의 변수가 나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내일을 모르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일에 대한 장담이나, 미래의 계획에 대한 자랑이 아니라 ‘매일의 긍휼’입니다.

셋째, 우리의 최우선적인 관심은 주님의 뜻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야고보서4:17). 이 본문에서 과연 ‘선’이 뭘까요? 우리가 행해야만 하는 ‘선’이 뭡니까? 이 본문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렇게 바꿔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뭐가 ‘선’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선’아니겠습니까? 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합니까? 이유는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그것을 헤아리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에 대하여, 개 고양이에 대해서는 관심이 지극히도 많은데 하나님에 대하여 그 하나님을 알아 가는데 대해서는 무관심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의 뜻을 아는데 대한 갈망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에 대한 욕망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느냐 하면, 우리의 생각 속에는 온통 내 뜻, 내 계획, 내 주장, 내 관심으로만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이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금지하는 것을 해버릴 때 그것이 죄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도 불구하고 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아예 죄라고 여기지 않거나 죄라고 여겨도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죄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는 것이나 ‘하라’는 명령을 행하지 않는 것 모두가 동일한 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삽시다. 나를 모르고 허풍을 떠는 인생을 살지 맙시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선한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영원히 살 것처럼 일합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삽시다. 오늘만 내 날입니다. 내일이 내 날이 될지 안 될지는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행해야 할 선한 일이 있다면 오늘 하십시오.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내일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임해야 내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순간순간 마다 ‘데오 볼렌테’(주님의 뜻이면)를 마음속으로 외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덴버삼성장로교회 
이동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