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의 리더십, 온 세상의 애도

2025-04-25     weeklyfocus

프란치스코 교황이 부활절 다음 날인 4월 21일, 선종(善終)했다. 향년 88세였다. 언제나 온화한 미소로 소외된 이들의 곁을 지켜온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소명을 다했다. 선종 전날까지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 나와 부활절을 축하하며 신자들에게 인사를 건넨 그의 모습은, 끝까지 인간의 존엄과 희망을 품으려 했던 한 지도자의 진심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과 종교계, 시민사회는 일제히 깊은 애도를 표했다. 바티칸에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조문객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으며, 수많은 성당과 광장에는 그의 사진과 함께 촛불과 꽃이 놓여 있다.

유엔과 유럽연합은 그의 리더십을 “세계 양심의 등불”로 평가했으며, 이슬람권과 불교권 지도자들 또한 “종교를 넘어 인류의 평화를 기도한 인물”로 그를 기억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선 이날 오전 11시 교황을 기리기 위한 조종(弔鐘)을 울렸다. 매일 밤 에펠탑을 점등하는 파리시는 교황의 선종을 애도하는 뜻에서 이날 밤엔 불을 켜지 않았다. 아시아 최대 로마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의 여러 성당에서도 이날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을 애도하는 종을 울렸다. 영국 정부는 교황의 선종을 계기로 화요일 저녁까지 정부 청사에서 반기(半旗)를 게양하도록 했다. 이탈리아에서도 교황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조기를 게양했다. SNS를 통해 일반 시민들도 “우리 시대의 진정한 위로자”, “가장 인간적인 교황”이라며 깊은 슬픔을 나누고 있다. 이탈리아를 방문 중인 JD 밴스 미국 부통령은 교황이 만난 마지막 인사로기록되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또한 “그와 그를 사랑한 모든 이들을 신이 축복하길 기원한다”면서, 연방 정부 건물에 조기 게양을 명령했고 교황의 장례식에도 멜라니아 여사와 함께 참석하기로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3월, 가톨릭 역사상 최초의 남미(아르헨티나) 출신 교황으로 선출되어 지난 12년간 전 세계 14억 가톨릭 신자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는 1936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성요셉 신학교에서 공부해 사제서품을 받고 2001년 추기경에 서임됐다. 베네딕토 16세가 2013년 건강상의 이유로 교황직에서 스스로 물러나자 같은 해 266대 교황에 선출되었는데, 프란치스코는 첫 아메리카대륙 출신 교황이자 첫 예수회 출신 교황,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사용한 최초의 교황이었다.
 교황은 진보적인 행보로도 눈길을 끌었다. 가톨릭 교회의 핵심 교리와 전통적인 가르침을 큰 틀에서 유지하면서도 동성애에 대한 부당한 차별이나 세례 거부 등을 비판하며 포용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여성을 처음으로 교황청 장관에 임명하기도 했다. 병상에서도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 전쟁을 비판하며 평화를 강조했다. 그의 생애 마지막 메시지도 가자지구의 평화였다. 이름 그대로 ‘가난한 이들의 친구’였던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그는, 기존의 권위적이고 형식적인 교황상의 틀을 깨뜨렸다. 검소한 삶, 겸손한 태도, 그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한결같은 연대는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종교인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가 머문 바티칸 시티는 단지 가톨릭의 행정 수도를 넘어, 전 세계 신앙의 상징이며 도덕적 양심의 중심이다. 인구 1,000명 남짓의 이 작은 도시국가는 수 세기에 걸쳐 인류의 영적 방향을 제시해 왔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직 사람을 위한 종교, 연민과 평화를 위한 믿음을 외쳤다. 그가 바티칸에서 보낸 12년은 인류 공동체를 향한 따뜻한 메시지의 연속이자, 신앙과 행동이 일치된 삶의 전형이었다. 이처럼 그의 교황 재임 12년은 단순한 종교적 통치 기간을 넘어, 인류 공동체를 향한 따뜻한 메시지의 연속이었다. 환경문제에 대한 교황의 경고는 ‘공동의 집을 돌보라’는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로 구체화되었고, 난민과 빈곤 문제, 전쟁과 차별에 대한 꾸준한 목소리는 국제 사회의 양심을 일깨웠다. 무엇보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연민’이었다. 단죄보다 이해를, 배제보다 포용을 우선한 그는 복잡하고 상처 많은 현대 사회에 하나의 빛이 되어주었다. 그는 “하느님께서는 늘 용서하시지만, 우리는 때때로 용서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교회 내의 폐쇄성과 배타성에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순금 대신 철로 만든 십자가를 지니고, 호화 관저 대신 일반 사제들의 숙소에서 생활했던 교황은 마지막 순간도 검소했다. 유언장에 자신을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이 아닌, 성당 밖 지하 무덤에 묻고, 특별한 장식을 하지 말아달라는 뜻을 남겼다. 이제 우리는 그의 부재 속에서, 그가 남긴 발자취를 돌아보게 된다. 그의 생애는 하나의 선언이었다. 신앙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거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삶은 언제나 가장 작은 자들, 가장 아픈 자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은 하나의 시대가 저물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가 남긴 온기와 울림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다. 시대를 위로한 목소리, 그 온화한 미소를 기억하며, 우리 모두가 조금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가기를 바란다.     
<발행인 김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