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도 필요한 베테루의 집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가장 불편한 것이 지하 주차장이었다. 불편함에 두려움에 섞여 있을 정도로 밤에 다니는 지하 주차장을 매우 싫어했다. 한 번은 지하 주차장에서 차 문을 잠그던 중 갑작스럽게 숨막힘을 느꼈다. 텅 빈 공간, 희미한 조명, 범죄현상이 연상되는 음침한 분위기, 그리고 나 홀로 남겨진 듯한 고립감이 순식간에 밀려왔다. 어린 시절부터 폐쇄된 공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품고 살아왔지만, 그렇게 육체적 반응으로 드러난 건 처음이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나만의 약점, 그 날 이후로 자꾸 마음이 짓눌렀다.
우리는 누구나 감추고 싶은 마음의 어두운 조각 하나쯤은 안고 살아간다. 누군가에겐 무대 공포증, 또 다른 이에게는 물에 대한 공포, 혹은 어린 시절 겪었던 실패의 기억일 수 있다. 나 역시 그랬다. 어두운 방에서 잠들지 못 하고, 수영장 물이 가슴까지 올라오면 어느 새 숨이 턱 막히는 경험을 반복해왔다. 하지만 나는 그런 두려움들을‘없는 척’해왔다. 스스로도 나의 약점을 외면한 채 살아온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친구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지하주차장에서 느꼈던 공포를 이야기하자, 친구 역시 자신의 두려움을 말하기 시작했다. 고소공포증, 폐쇄공포증, 엘리베이터에 대한 불안, 실패에 대한 지나친 불안, 사람 많은 곳에서의 답답함까지, 서로의 약점을 고백하면서 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신기하게도 그날 이후, 나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말 한 마디가 가져온 해방감은 예상보다 훨씬 컸다.
나는 점점 내 작은 두려움들을 이야기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았고, 모두가 크고 작은 짐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 사실은 나를 더이상‘이상한 사람’으로 느끼지 않게 만들었다.
일본 홋카이도에는 ‘베테루의 집 (べてるの家, Bethel House)’이라는 공동체가 있다.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정신 장애인들이 모인 공동체이다. 이 곳은 단순한 복지 시설이 아닌, 정신 질환을 가진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생활하고, 치유해 나가는, 실험적이면서도 혁신적인 공동체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상태를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병명조차 스스로 만든다. ‘경찰의존’, ‘인간알레르기’, ‘생글생글병’등 전문의가 내린 병명이 아닌, 본인들이 느끼는 고통에 가장 솔직한 표현을 만들어 서로를 이해하며 살아간다. 어떤 이는 35년 동안 어머니와 떨어져 살아본 적이 없는 자신을 ‘모친의존’이라 부르고, 그 의존을 벗어나는 여정을 기록하며 상을 받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의 약점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산처럼 공유하며 서로의 치유를 돕는다. 그리고 이들은 말한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이처럼 베테루의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타인과 연결되고, 그 속에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리고 이들은 매년 ‘환각 & 망상대회’를 열어 자신만의 고통과 경험을 유쾌하게 나눈다. 웃음과 고백이 공존하는 그 곳은, 오히려 우리 사회보다 훨씬 더 건강해 보일 때가 있다.
필자는 이런 베테루의 이야기를 접하며 문득 생각했다. 왜 우리는 평생을 약점을 감추며 살아가는 걸까. 상처를 드러내면 약해 보일까 봐, 무능력해 보일까 봐, 혹은 불쌍하게 여겨질까 봐, 이유는 다양하지만 결국은 ‘타인의 시선’이 문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모두 그 시선 속에서 자유롭지 않다. 타인을 의식하며 강해 보이려 애쓰지만, 정작 가장 절실한 건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일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감추고 싶은 무엇인가가 있다. 누군가에겐 학창시절의 큰 실수, 누군가에겐 가족에 대한 아픔, 또 다른 누군가에겐 반복되는 실패의 기억일 수 있다. 그걸 억지로 숨기려 들면 들수록 마음은 더 무거워진다. 오히려 그 약점을 인정하고, 말하고, 공유할 때 비로소 그 무게는 가벼워진다. 이상하게도 약점을 먼저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이들도 마음을 연다. 마음이 마음을 부르는 것이다.
이제는 어두운 방에서도 조금씩 불을 끄고 자보려 한다. 아직 완전히 편하진 않겠지만, 괜찮다. 중요한 건 두려움이 없어진 게 아니라, 그 두려움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아이들과 수영장에 가서도 예전처럼 물가에서 망설이기 보다는, 함께 발을 담그고 놀아 볼 생각이다.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일 지 몰라도, 내겐 큰 진전이다.
가끔 우리 모두에게는 ‘베테루의 집’과 같은 삶의 공간이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약점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말해도 괜찮은 분위기, 마음의 짐을 서로 나누고, 부끄러운 부분도 함께 웃을 수 있는 공동체. 그러니 더 이상 아닌 척 혹은 잘난 척 하지 말고, 완벽한 척도 하지 말자. 우리가 정말 필요한 것은 ‘강함’이 아니라 ‘진실함’이다.
약점은 결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연결의 실마리이고, 진짜 나를 드러내는 용기이다. 그러니 이제는 무장된 강함 대신, 조금은 투박하고 맨살 같은 솔직함으로 서로를 마주보면 좋겠다. 오늘부터라도 우리 모두 숨겨둔 마음의 병을 훌훌 벗어던지고, 자신의 약점에 좀 더 솔직해져 보는 건 어떨까 싶다.
<발행인 김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