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문화 기행
1984년 4월, 필자가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작은 마을(al-Diraiya)에 도착했을 때의 첫 경험은 중동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독특한 시간 여행과도 같았다. 그곳은 한때 사우디아라비아의 옛 수도로 존재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이었다. 마을 주변의 풍경은 단순하면서도 경이로웠다. 흙으로 만든 성터와 모스크가 여전히 남아 있었고, 계곡을 따라 이어진 수많은 팜트리(대추야자나무)는 생명의 흐름을 상징하듯 초록빛으로 반짝였다. 이곳의 대추야자 열매는 지역 주민들에게 중요한 식량자원이었다. 특히 양고기와 함께 즐기는 독특한 요리(Kabsa and Mandi)는 이 지역의 문화를 대변하고 있다.
사우드 왕조와 옛 수도의 역사
이 작은 마을은 단순히 자연의 아름다움만으로 기억될 곳이 아니었다. 역사 속에서 중요한 전투와 정치적 격변을 경험한 현장이기도 하다. 18세기 후반 나지드(Najd) 부족을 통치하던 사우드 왕가는 이 지역에서 라이벌인 하일(Ha'il) 지역을 통치하던 라시드 가문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쿠웨이트로 망명을 했다. 그러나 사우드가의 압둘 아지즈가 전사들과 함께 돌아와서 리야드를 탈환하고 사우드 왕조의 토대를 세웠다.
특히 이곳에서 무함마드 이븐 압두 알 와하브라(Muhammad Ibn Abd al-Wahab)라는 율법학자와 동맹을 맺은 사건은 사우드 왕조의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와하비는 이슬람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와하비즘의 창시자로, 그의 종교적 이념과 사우드 왕가의 정치적 야망이 결합되며 새로운 형태의 권력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 동맹은 아라비아 반도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여러 부족을 점령하고 통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종교와 정치의 결합
와하비즘은 이슬람의 순수성을 강조하며, 사우드 왕가의 다른 부족과의 전쟁에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와하비의 가르침에 복종했던 전사들은 지하드라는 이름 아래 자신의 목숨을 내 놓았고, 이들의 희생위에 사우드 왕국의 기초가 세워졌다. 이 동맹은 단순한 협력을 넘어 정치와 종교가 한 몸이 되는 체제를 만들어냈다. 와하비 학자들은 종교적 권위로 사우드 왕가의 정책을 뒷받침했고, 사우드 왕가는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며 왕국을 확장했다. 종교경찰로 알려진 ‘무타와’(Mutawa)는 이 결합의 상징과도 같았다. 이들은 종교적 규율을 강제하며 개인의 삶에 깊숙이 개입했다.
현대 사우디아라비아의 변화
모든 구조는 영원하지 않다. 사우드 왕가와 와하비즘 사이의 동맹도 시대의 흐름 속에서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현대화와 개혁이라는 새로운 물결이 사우디아라비아에 밀려오면서, 이 오래된 결속은 서서히 균열을 보였다. 21세기 들어오면서 사우디아라비아는 왕세자 Mohammed bin Salman Al Saud의 주도하에 글로벌 경제와 문화적 변화에 발맞추기 위해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종교경찰의 해체는 변화의 중요한 상징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강력했던 무타와의 권력은 사라졌고, 사람들의 일상에서 종교적 규율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종교와 정치의 담합은 오랬 동안 사우디아라비아의 사회 안정을 유지하는 기반이었으나, 현대의 개혁은 이 결합을 흔드는 계기가 되었다. 여성의 권리 신장, 문화의 개방, 경제 다각화 등의 정책은 종교적 전통과 충돌했으며, 사우드 왕가 내부에서도 왕자의 난을 비롯해서 권력의 균열이 나타났다.
갈등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사우디아라비아의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정치적 사건의 나열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역사적 함의를 담고 있다. 와하비 전사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왕국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희생의 의미를 재정의해야 하는 시대에 직면했다.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는 종교적 보수성과 현대적 개혁 사이에서 길을 찾고 있다. 그 과정은 갈등과 혼란을 동반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여정이다. 과거의 희생과 현재의 변화를 함께 바라볼 때, 필자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단순히 중동의 한 국가를 넘어 이슬람 역사와 현대가 맞물리는 거대한 실험의 무대임을 보게 된다. 사우드 왕가의 통일과 그 뒤에 숨은 희생은 역사적 사실로서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 희생의 열매가 현대의 균열 속에서 어떤 의미로 자리 잡을 것인지는 사우디아라비아 국민과 이슬람 세계가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특히 이스라엘과의 국교 정상화 추진에 대하여 이슬람 세계의 반대가 있음에도 그럼에도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스라엘과의 국교를 원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최근 몇년간 인권 문제와 원유 생산 조절 문제로 갈등을 빚어왔던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군사 및 경제 지원을 확보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통해 오랜 기간 경쟁 관계에 있는 이란을 견제하고, 탈석유 경제 정책의 일환으로 이스라엘의 첨단 기술, 국방, 농업, 수자원 관리 등 뛰어난 기술력을 도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여운
팜 트리가 이어진 계곡은 단순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넘어 과거 전쟁과 부흥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였다. 흙으로 지어진 성터는 과거 이곳이 방어와 정복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주었다. 그 땅위를 거닐 때마다, 필자는 옛날 이곳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전사들의 자취와, 그들이 품었을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작은 마을은 단순히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이슬람 역사와 문화의 상징이었다. 오늘날의 현대적이고 화려한 사우디아라비아의 도시들이 놓치기 쉬운, 그 뿌리를 이야기해 주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이러한 장소에서의 경험은 그 자체로 역사의 교훈이 되었고,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소중한 기억으로 내 마음에 남아 있다.
홍해선교회
조완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