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2024-12-25     weeklyfocus

임마누엘은 무엇을 뜻할까요? 성경 마태복음 1장23절에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의 뜻은 히브리어 ‘임’(함께, with)와 ‘마누’(우리와, us)와’엘’(하나님, God)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또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 700년 전에 이미 이사야를 통해서 이사야7장14절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으로 예언해 주셨습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 예수님은 구원자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 우리가 찬송을 드릴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탄의 감격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성탄의 기쁨이 어디에 있습니까? Merry Christmas가 왜 merry입니까? 왜 성탄이 기쁘다고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비천한 나를 찾아 오셨기 때문이요, 찾아오신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은혜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탄이 기쁜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독일의 유명한 설교자 헬무트 틸릭케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탄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 있든지 찾으러 오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성탄의 메시지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찾아오신다.

그리고 모든 것이 절망에 다다른 듯이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의 기회는 정말 시작된다는 데 있다." 좀더 쉽게 이야기하면, 내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마리아를 찾아오셨던 하나님,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모두를 찾아오신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다는 데 성탄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내가 절망에 빠져 고통을 당하며 허덕이고 온 천지가 캄캄해 보여도 그 순간에 하나님이 나를 찾으시고 나를 통해서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는 진리를 가르쳐주는 데 성탄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가 체험한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와 같은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마리아처럼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 가운데는 유명한 분들도 가끔 계시긴 합니다만 그런 분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길에 나가서 반나절을 돌아다녀도 저를 안다고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평범합니다. 그리 부자도 아닙니다. 가문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잘난 것도 별로 없습니다. 한국 사람이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미국 사람 옆에 갖다 세워놓으면 잘나지 못했습니다. 우린 다 못난 사람들입니다. 여자고 남자고 간에 하나님이 동양 사람을 만드실 때는 좀 실수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내놓을 것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찾아오시고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말씀합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우리가 험한 인생고의 파도가 쉴 날이 없이 몰아치는 망망한 대해와 같은 이 세상을 살다 보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이 믿음을 끝까지 붙들고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이미 체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가장 뛰어넘기 어려운 장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하나님이 계시면 어디 계시냐,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해 버릴 만큼 절박한 상황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냐 안 계시냐를 가지고 의심하는 판국에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 세상이 험하기 때문에 어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믿었는데 오늘은 믿기가 힘들다고 하는 생각을 가질 때도 있다는 말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형들이 그 어린 나이의 요셉을 질투하고 미워해서 결국 노예로 팔아먹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별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임마누엘입니다. 요셉의 기사를 보면 중요한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꼭 말씀하시는 한마디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별명이 임마누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자연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요셉에게 함께 하셨다면, 형들이 잔인하게 그 동생을 노예로 팔아먹는 그 자리에서 왜 침묵하고만 계셨는가? 하나님은 그 때 무엇을 하고 계셨단 말인가?' 형들이 "형이여, 살려다오. 살려다오. 잘못했어. 살려다오." 하며 울부짖으며 몸부림치는 동생을 굴에서 끌어내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노예로 팔아먹을 때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셨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하나님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분명히 대답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니라." 하나님은 요셉에게 한마디도 안 하셨습니다. 15년 동안 왜 그가 그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15년 내지 20년이 지나고 나서 드디어 요셉은 스스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아하, 하나님이 나에게 이 잔인하고 피눈물을 쏟지 아니할 수 없는 고통을 허락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하는 사람으로 완전히 바뀌었지 않습니까? 창세기 50장 20절을 보십시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쉽게 말하면 이런 말입니다. "형들이여,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고 했고 사실 많은 해를 끼쳤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악을 선으로 바꾸어서 나도 살고 당신도 살도록 하기 위해서 작정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한동안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 헤맬 수도 있습니다. 요셉은 15년 동안이나 헤맸습니다. 우리도 왜 부도가 났는지, 왜 이렇게 생활이 갑자기 어려워지는지, 왜 이렇게 직장을 얻지 못해 방황을 해야 하는지 헤맬 수 있습니다. 기도도 잘 안나옵니다. "하나님!" 하고 울부짖다가도 속에서 화가 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런 일을 나에게 허락하신 데는 분명 선한 뜻이 있다는 믿음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생명입니다. 이 고난이 나중에는 축복으로 바뀐다는 믿음을 꼭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오늘밤에는 우리 가정에서 눈물이 떠나지 않지만, 내일 아침에는 기쁨이 찾아온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고난의 길을 걸어가면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날이 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허락된 이 고통도 선한 뜻을 가지고 허락된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을 항상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과 다른 차이점입니다. 

 

세계선교교회
김교철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