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입

2024-10-05     김현주 편집국장

 로마의 여름은 이곳 콜로라도 보다 지독했다.  조금만 걸어 다녀도 목덜미가 바늘로 콕콕 찔리는 듯 따갑다. 그렇게 땡볕을 가르고 묵묵히 찾아간 곳은 진실의 입(Bocca della Verita, 보카 델라 베리타)이다. 보카 델라 베리타 광장의 한 켠에 있는 코스메딘 산타 마리아 성당, 진실의 입은 그 성당 입구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 이름 그대로 진실을 심판하는 입을 가진 얼굴 모양을 한 돌판이다. 이 진실의 입은 해신 트리톤의 얼굴을 조각한 것인데, 그레고리팩과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코믹 로맨스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와서 더욱 유명해졌고, 주변에 한글로 된 낙서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해 국제적인 망신을 사기도 한 곳이기도 하다.

‘보카 델라 베리타’에서 보카(Bocca)는 입, 베리타(Verita)는 진실을 의미한다. 이 진실의 입은 거짓말을 한 사람이 진실의 입에 손을 넣으면 손이 잘린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실제로 중세의 악덕 영주들은 자신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들에게 손을 넣게 하고는 뒤에서 몰래 손을 자르게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여하튼 지금까지 진실의 입을 찾아온 관광객은 너무 많아서 셀 수 조차 없다. 사람들이 트리톤의 입 속에 손을 넣고 사진을 찍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태리 로마의 관광 코스 중 하나가 되었다. 소소한 거짓말은 했지만 큰 거짓말은 안하고 살았다는 것을 거기까지 달려가서 당당히 검증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진실의 입을 찾는 이유가 꼭 ‘로마의 휴일’에 대한 추억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혹 진실에 대한 목마름 때문은 아닐런지.     

하지만 진실의 입도 오랜 세월 동안 이빨이 닳아 버렸는지, 손목이 잘려나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현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 또한 진실의 입에 손을 넣기까지 잠시 주저했다. 그 동안 어떤 거짓말을 했나, 정말 손이 잘리는 건 아니겠지 하면서 별별 생각을 다했다.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그 동안 했던 거짓말은 기억이 잘 나지 않으니, 앞으로도 안 하겠다’는 속성 기도도 했던 것 같다. 이렇게 진실의 입 앞에서 유치하게 반성하던 필자의 모습은 아주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아있다.  

만약 이런 진실의 입을 콜로라도에 가져다 놓는다면 어떨까. 진짜 손목이 잘릴까봐 지레 겁먹고 손조차 넣어 보지 못하고 주저할 이들이 분명 있을 것 같다. 거짓과 조작에 환호해왔던 사람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이 사람들은 옆집에 사는 철이 아빠가 빌딩을 샀다는 것에, 앞집에 사는 순이 엄마가 명품을 샀다는 것에, 건너 집에 사는 철수가 돈 많은 여자를 만났다는 것에 발끈한다. 그것도 사기를 쳐서 돈을 모아 빌딩을 샀고, 집 페이먼트도 못 내면서 허영에 가득 차 명품을 샀고, 바람기의 대부인 아버지를 닮은 탓에 돈 많은 여자를 잡았다는 조작된 가설이 더해진다. 진실은 20여 년 동안 열심히 땀 흘려 일해 모은 돈으로 빌딩을 샀고, 오랫동안 많은 사람을 도와주다가 그 중 한 사람으로부터 감사의 뜻으로 받은 가방이었고, 아버지와는 달리 건실하게 살아온 대가로 좋은 여자를 만난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필자 또한 사람인 탓에 몇몇 지역 인사들에게 불만을 가진 적도 있고, 한인사회의 구성원인 탓에 한인회에 대한 불평을 늘어 놓은 적이 있다. 그런데 몇 일 전 사진첩 속에 꽂아둔 진실의 입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서 이 불만들이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생긴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진실과 그들이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속내를 알게 되면 필자의 비판도 수그러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개인적인 비호감은 조용히 해결할 수 있기에 문제 삼을 필요가 없지만, 한인사회에 활짝 열려 있어야 하는 한인회가 문을 닫고, 빗장을 걸어둔다면 이들에게서 진실을 찾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10월에 접어드는 지금, 한인회장 선출을 위한 선거관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두개의 한인회가 통합되기 전 회칙에 따라 7월에 새 한인회장이 선출되었어야 했지만, 통합  후에는 1월부터 새 임기를 시작하는 것에 합의된 것으로 안다. 임기를 시작하는 시기가 뭐그리 중요하겠는가, 문제는 스스로 한인회장에 출마하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선관위의 진실은 한인회장단 및 이사 등록 공고를 통해 한인회를 가늘게라도 이어가고자 하는 것일게다. 회장으로서의 완벽남이 한 명만 나선다해도 통합된 한인회의 명분을 충분히 이어나갈 수 있을텐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아쉽다. 초등학교 반장선거에서도 서로 반장을 하려고 아우성이다. 이유는 멋져 보이기 때문이라는데, 한인회장 선거 때마다 후보 찾아 삼만리인 것은 한인회가 전혀 멋져 보이지 않기 때문은 확실해 보인다.  지금까지 한인회는 동포들의 정당한 허락도 받지 않고 한인을 대표하는 명칭을 염치없이 계속 사용해왔다. 한인사회의 대표 자격으로 타이틀을 쓰기 위해서는 요리조리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종이 회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인사회의 인증이 필요하다. 동포들도 문제다. 한인회라는 곳에 진실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관심조차 없어져 버렸다. 이렇게 오랫동안 의미를 잃어온 한인회의 행보를 보면서 어떤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가를 구분하기 힘들어졌다. 그래서 전설 속에 등장하는 그 진실의 입과 같은 것이 콜로라도 한인사회에도 만들어져 시비를 가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되려 돈을 주고서 한인회장이 되어 달라고 해도 안할 판인데, 회장단이 되려면 1만불이나 내어놓아야 한다면 더더욱 나설 후보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후보 등록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 공탁금을 낮게 조정해도 된다고 본다. 말로만 통합했지만, 재판과 법정소송을 이어가면서 한인회의 기능은 마비되었고, 이로 인해 서로에 대한 야유와 비난이 난무하면서, 이미지가 나빠질대로 나빠진 한인회는 그동안 그 역할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통합을 했다지만 제대로 꾸려보지도 못한 지 4년이다. 이번 선관위는 대부분 전직 한인회장들로 구성되었다. 젊은 세대들에게 넘겨줄 반듯한 한인회를 위해, 한인회의 정통성을 이어온 전직 한인회장들이 뜻을 모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이번 만큼은 진실의 입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한인회의 모습이 갖추어지길 기대해본다.   

<발행인 김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