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들 성경 : 히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추석 명절이 지났습니다. 명절에 고향을 가는 길은 시간이 걸려도 차가 막혀도 충분히 견딜 수 있지요.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지요. 그래서 추석 명절은 그리움의 계절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움, 이 얼마나 찬란한 단어일까요?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이웃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그 그리움 때문에 추석 명절은 아름다운 거지요.
그런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리움에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반가움이지요.저는 추석 명절이 되어도 외갓집을 찾지 않습니다. 그렇게 반가워해 주시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다 세상을 뜨셨으니까요. 그리움은 갔지만 반가움이 없으니 시쿤둥해지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제 그리움을 반가움으로 맞이해 줄 고향이 어디일까? 그래서 내린 결론은 ‘우리교회’입니다. 저는 은퇴 후에 교회에 그리움으로 옵니다.
그리고 성도님들이 반가움으로 맞이해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 교회가 저에게는 고향이지요.구약시대,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믿음이었는가? 히브리서 11장은 설명합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이었다.”
신약 시대의 언어로는 하늘나라, 천국을 그리움으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의 믿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 유산을 허랑방탕하고 비참하게 살다가 아버지의 집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리움이 속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먹을 것도 풍족한데.”
그리고 타는 듯한 그리움으로 돌아오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아들이 집을 나간 그 날부터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팔 벌려 반가움으로 그 아들을 맞이해 주시고 가락지를 끼우고 새 옷을 입히고 잔치를 벌이셨어요.
이럴 줄 알았더면 빨리 돌아올 걸. 이 비유 속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돌아온 탕자는 죄와 허물 속에 사는 우리들이지요. 그러니 그리움은 축복이고 반가움은 은혜이지요. 아버지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지를 깨닫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더 나은 본향을 기다리는 구약의 성도들의 삶의 방식을 두 개의 단어로 설명합니다. “이 세상을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다.”
외국인과 나그네를 묵상합니다.
첫째, 그들의 결론은 이 세상이 아니고 돌아갈 하늘나라, 반가움으로 기다리는 거기지요.
둘째, 그러니 지금은 임시로 사는 것, 지나가는 것, 지나가는 지금은 그날, 거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알고 견디는 자들이 외국인과 나그네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이지요.
셋째, 외국인과 나그네로 이 세상을 사는 것은 불편해요. 그러나 저 앞을 내다보며 참지요.구약의 성도들은 바벨론 포로 중에도 예루살렘 성전을 사모하며 모든 고난을 견뎠습니다.
그러니까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우리는 천국에 이르기 전에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예배드리는 성전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설명입니다. 그것이 불편할지라도 참고 견뎌요.
넷째, 이 세상을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가는 자들은 사람의 기억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기억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 그거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한가지,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리스도의 날에 “잘 했다, 수고했다, 내가 너를 알고 있다.”는 말 한마디를 들으려 사는 자들이 더 나온 본향을 사모하며 세상을 사는 자들이지요. 오늘도 그 하늘나라를 그리워하는 그리움과 우리를 반가워해 주실 주님의 그 두 팔 벌린 반가움을 사모하며 소망 중에 모든 것을 견디며 승리하시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