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여가는 케이팝 쓰레기
케이팝(K-pop)의 인기와 영향력이 세계적으로 커지면서, 어깨가 으쓱해지는 소식이 자주 날아든다. 하지만 케이팝 전성시대에도 그늘은 존재한다. 바로 시디(CD)를 품은 실물 음반의 과잉생산 문제다. ‘앨범깡’, ‘팬싸컷’ 같은 표현이 이러한 문제를 잘 보여준다. ‘앨범깡’은 팬 한 사람이 동일한 실물 음반을 중복해서 구매하는 행위를 말한다. ‘팬싸컷’은 ‘팬 사인회 커트라인’의 줄임말로, 팬 사인회에 참석하기 위해 구매해야 하는 실물 음반의 개수를 뜻한다. 팬 사인회 응모권이 실물 음반 1장당 1개씩 들어있기 때문에, 팬들은 적게는 수십장, 많게는 수백장의 앨범깡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실물 음반은 시디, 케이스, 코팅 종이 등 대부분 플라스틱이다. 플라스틱은 생산·소각·재활용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온실가스를 배출해서 기후 위기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 앨범깡에 쓰인 실물 음반은 대부분 플라스틱 쓰레기가 된다. 이러한 플라스틱 쓰레기 처리에 드는 비용은 대부분 국민 몫이다. 쓰레기 처리도 문제이지만, 사진과 팬 미팅 응모권만 챙기고 실물 음반이 고스란히 버려지는 건 너무 아깝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지난주 일본 도쿄도 시부야 거리에 케이팝 가수의 새 앨범이 상자째 폐기된 영상이 온라인상에 퍼지면서, 우리는 케이팝의 그늘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영상에는 시부야의 한 백화점 인근 공원에 하이브 산하 보이그룹 ‘세븐틴’의 베스트앨범이 상자 수십 개에 널브러진 채 버려진 모습이 담겼다. ‘마음껏 가져 가세요’란 메모와 함께 버려졌다. 시부야는 도쿄 내에서 케이팝 성지로 꼽힌다. 대형 음반점 타워레코드는 5층을 케이팝 전용 층으로 운영 중일 정도여서 케이팝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앨범을 대량으로 사고 버리는 문제는 케이팝의 고질병으로 지적된다. 새 앨범이 이처럼 대량으로 버려지는 이유는 ‘미공포’와 ‘사인회·팬미팅 응모권’ 때문이다. 미공포란 미공개 포토카드의 줄임말로, 앨범을 사면 지급받는 ‘랜덤 포토카드’를 말한다. 포함된 속지 구성을 달리한 앨범 종류뿐만 아니라 구매처가 어디냐에 따라서도 미공포 형태, 지급 숫자가 랜덤으로 달라진다. 그래서 케이팝 팬들은 좋아하는 멤버 사진이 나올 확률을 높이려고 여러 구매처를 전전하며 앨범을 수십장씩 구입한다. 한국소비자원이 실시한 지난해 설문에 따르면 케이팝 음반 구매자 중 절반 이상인 52.7%가 “포토카드 등 굿즈를 모으려고 앨범을 샀다”고 답했다.
전 세계 케이팝 팬들에게 좋아하는 아이돌을 담은 포토카드는 가장 갖고 싶은 굿즈다. 귀한 사진은 중고 거래 장터에서 수십만원을 예사로 넘는다고 한다. 특정 음반 판매처에서만 살 수 있는 미공개 포토 카드나 팬 사인회에 참석한 이들에게만 주는 한정판 포토 카드 중고품 호가는 100만원대로 치솟는다. 작년 새만금 잼버리에 참석했던 각국 청소년이 받아든 최고의 선물도 BTS 포토 카드였다.
이를 아는 케이팝 기획사들은 포토 카드 수집욕을 자극하며 앨범 구매를 부추겨 왔다. 내용물에 어떤 사진이 들어 있는지 숨겨, 팬들이 좋아하는 사진을 손에 넣을 때까지 사실상 반복 구매를 강요하는 모양새다. 예를 들면, 78종으로 구성된 어떤 포토 카드 세트는 한 앨범에 6장씩만 들어 있다. 특정 아이돌의 사진을 모두 소장하려면 똑같은 앨범을 13장 사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중복 구매 후에 버려지는 앨범이 지난해 1억5천만장을 넘었다. ‘케이팝 쓰레기’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앨범 폐기물 문제를 해결하자는 자성의 목소리도 높다. 케이팝 팬들이 2021년 결성한 ‘케이팝포플래닛’은 앨범을 다량 구매하더라도 실물 앨범은 원하는 만큼만 받아 가는 ‘그린 옵션’을 달라고 음반 기획사에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정은 달라지지 않고 있다. 이번 세븐틴 앨범도 랜덤 포토 카드가 든 형태로 발매됐다. 발매 첫날에만 226만장이 팔렸다. 케이팝 베스트앨범 중 최다 판매 기록이라고 한다.
음반을 감싼 비닐 포장지, 시디 케이스 등은 생산자책임재활용(EPR) 제도 적용 대상이다. EPR은 생산자에게 의무적으로 제품의 일정량 이상을 재활용하도록 하되, 생산자가 직접 제품을 재활용하기 어려울 경우 제품의 회수·재활용에 드는 비용 일부를 부과하는 제도다. 실물 음반과 관련한 폐기물부담금, EPR분담금은 대부분 플라스틱에 부과된다. 지난 4년 동안 음반사들이 부과받은 ‘플라스틱 쓰레기세’는 폐기물부담금과 EPR분담금을 더해 약 3억5천만원이다. 불과 5년 2천3백만장이던 음반 판매량은 케이팝의 인기에 힘입어 국내외 포함 지난해 6천만장으로 집계되어 3배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은 곧바로 기획사의 매출 증가로 이어졌다. 한국 내‘빅 3’기획사로 꼽히는 하이브, 에스엠, 와이지가 팬데믹으로 대면공연이 막힌 상황에서도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이브, 에스엠, 와이지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각각 1903억원, 685억원, 506억원이었다. 수천만장의 플라스틱 음반을 팔아 막대한 이익을 거뒀지만, 이들 기업에 부과된 플라스틱 쓰레기세는 여전히 제자리이다.
케이팝 기획사의 과잉 마케팅전략으로 인해 또 다른 부작용도 나온다. 자신이 원하는 사진을 모두 가질 때까지 계속해서 앨범을 사다 보니, 이러한 중복 판매가 빈번해지고, 이러한 중복 판매는 인기 순위를 왜곡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를 눈여겨본 미국 ‘빌보드 200′은 작년부터 굿즈를 따로 살 수 있도록 해야만 순위에 반영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케이팝의 실태를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케이팝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케이팝의 쓰레기도 덩달아 높이 쌓여간다면, 케이팝의 이미지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