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의 한계
“저런 의대생이 의사가 되면 어떻게 하겠어요, 퇴학도 안됩니다. 당장 출교시켜야 합니다, 의술이 아니라 인성교육이 먼저 필요합니다.” 최근 한국에서는 유명 사립대 의대생들이 동기를 성추행한 사건으로 말들이 많다. 의대생 네 명이 민박집에서 함께 여행 온 여자 동기생이 술에 취해 잠든 틈을 타 속옷까지 벗기고 신체 부위를 만진 혐의를 받고 있다. 사람을 알아야 하는 것이 기본인 차세대 의사들이 이러한 행동을 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치열한 입시 경쟁 속에서 인성이 필요 없는 교육의 현주소가 잘 보여지는 사건이다.
친구 중 한 명은 몇 해째 한국의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있다. 그는 주일학교에서도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함께 간식을 먹다가도 공부 못하는 아이가 먹던 그릇에는 손대지 않는 일부 아이들을 보면서‘아이들의 인성이 위험수위에 이르렀다’ 는 얘기를 털어놓았다. 성적 경쟁이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내려오면서‘공부 잘하는 것은 선’이고 ‘못하는 것은 악’이라는 그릇된 기준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였다. 치맛바람 꽤나 날리는 친구의 엄마가 학교를 찾아와 아이가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니까 청소시간에 빼달라고 담임 선생님께 요구하던 것이 기억난다. 그 엄마의 큰 목소리는 아주 당당했다. 그리고 그 친구는 대입 시험을 칠 때까지 청소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근황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대학은 갔지만, 취업시험에서 계속 떨어진 그는 결국 부모님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매니저를 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필자 또한 성적 우선주의에서 혜택을 본 사람이기 때문에, 이러한 현실을 꼬집기에 부족하다는 걸 안다. 고등학교 시절, 사학 개혁을 위한 전교조 집회가 한창이었다. 함께 풍선을 날리고, 집회 일정을 공지했던 동창들이 여섯 명이 있었다. 산꼭대기에 있었던 학교 교문에 전교생을 모으는 일이 첫 번째 임무였다. 학교측의 방해로 비상연락망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우린 007작전을 벌여야 했다. 학교 아래 있던 삼거리에서 각 방향으로 학생들이 모여 교문으로 출발했다. 전교생의 70%가 참여했던 당시 나름대로의 대규모 집회였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전교조 소속 선생님들의 절반은 학교를 사직했고, 나머지 절반은 전교조에서 탈퇴하기로 하고 학교에 남았다. 그리고 이 집회를 앞에서 도운 여섯 명 중 다섯은 정학을 당했다. 나머지 한 명은 반성문 한 장으로 사태가 마무리되었는데, 그 한 명이 필자였다. 학교 성적 상위 3%에 해당하는 학생에 대한 교장 선생님의 선처였다. 징계 수위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동지들과 끝까지 함께 하지 못했던 이 기억은 필자에게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남아있다. 그때도 학교 생활은 분명 성적순이었다.
학교 다닐 때만 잠시 친구를 만든다는 요즘의 학창 시절, 기본적인 상식과 양심을 모르는 아이들, 교사들이 교훈이 되는 이야기를 하려 하면 되레 ‘진도 나가요’라고 말하는 아이들, 부모와의 대화는 세대차이라고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아이들, 공부하는 시간 부족할까봐 대화 안 한다는 부모들, 이 모든 것이‘1등 하면 다 용서되는 사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에 사는 우리는 훨씬 좋은 조건이다. 학교를 빠지고 여행을 가는 일은 한국의 학교에서는 드문 일이다. 그런데 미국 학교는 가족여행을 환영하는 분위기이다. 지난주 정기휴간이어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일정상 큰 아이 학교를 하루 결석해야 해서 조심스레 선생님에게 물어봤다. 담임 선생님은 오히려 기뻐하며‘즐거운 여행이 되라’면서 이메일까지 챙겨 보냈다. 그 이유를 여행을 가면서 알게 됐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옐로우 스톤까지 10여 시간을 달렸다. 차 안에서 간식을 먹고, 영화를 보고도 도착하기까지에는 시간이 한참 남았다. 지겨웠던 아이들은 수다를 떨기 시작했고 친구들 이야기, 선생님 이야기, 좋아하는 장난감 등을 이야기했다. 필자는 처음으로 큰 아이가 싫어하는 선생님에 대해 알게 됐고, 제일 친한 친구의 이름을 들었다. 아이들도 엄마가 자동차 뒷자리에 앉는 것을 싫어하고, 아빠가 자기들을 위해 담배 피는 것을 참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얼마 전 큰 아이가 한글로 일기쓰기를 시작한 것 또한 내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하루에 50센트씩을 주기로 하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수확이 있었다. 처음에는 맞춤법과 띄어쓰기, 조사 사용에 중점을 두었지만, 지금은 오늘 하루 동안 아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통로가 되었다. 차 안에서 나누었던 대화들, 그리고 일기장 속의 주인공들은 결코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평생 함께 할 가족과 친구를 만들 수 있는 도화선이 될 것이다. 이러한 도화선들이 모여 우리 아이들의 인생을 찬란하게 비춰 줄 것이라 믿는다. 이번 여행이 아니었으면 필자도 인생의 최고 성적을 얻기 위해서는 교과서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살았을 것 같다. <편집국장 김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