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은 만우절이기도 하지만, 유관순의 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관순 열사가 충남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지 94주년이 되는 날이다. 1919년 4월 1일은 음력으로 기미년 3월 1일이었다.
18세의 이화학당 여학생으로서 시위를 주도한 유관순. 그는 평소 꽤 특별한 여학생이었을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여학생이었다.

   유관순의 동네 친구 중에 독립운동가 남동순 선생이 있다. 유관순보다 한 살 어린 남동순은 2010년에 108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그는 유관순이 사소한 일에도 경쟁심과 질투심을 보였다고 증언했다.
유관순한테는 사내아이 같은 면모도 있었다. 돌을 세워놓고 쓰러뜨리는 비석치기 같은 놀이도 마다치 않았다. 또 이화학당 출신인 김혜정의 증언에 따르면, 유관순은 계단을 내려올 때 층계를 이용하지 않고 난간에 걸터앉아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기도 했다고 한다. 말괄량이 삐삐를 연상시키는 소녀였던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장난꾼'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장난도 꽤 심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이화학당 학생들은 잠자기 전에 단체 기도를 했다. 같은 방을 쓴 이정수(훗날의 보각 스님)의 증언에 따르면, 그날 대표로 기도하던 날이었던 유관순은 기도 막바지에 같은 방 여학생들을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가 아닌, "명태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 일로 유관순은 물론이고 같은 방을 쓴 학생 전원이 품행점수 F를 받았다. 그 방에는 한 달간 빨간 딱지가 붙었다.
친구들이 물어봤다. "왜 명태 이름으로 빈다고 했느냐?" 유관순은 "이정수네 집에서 부쳐준 명태 반찬이 하도 맛있어서, 그 명태 생각이 나서 명태 이름으로 빈 거야"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그는 유쾌하고 장난스러운 평범한 여학생이었다.

   이처럼 여느 소녀와 별반 다를 게 없었던 유관순은, 학교 근처인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 고종 황제의 빈소가 차려지고 종로 파고다 공원의 만세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하는 정치적 격동 속에서 매우 특별한 소녀 투사로 거듭났다. 3월 10일 자로 휴교령이 내려져 이화학당 기숙사가 문을 닫자 그는 고향으로 떠나는 기차에 몸을 실었고, 이 기차 여행은 그를 3?1운동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고향에 내려간 유관순은 연락책 겸 태극기 담당이 되어 4월 1일 아우내 장터 시위를 조직했다. 시위 당일, 그는 부모님과 함께 장터로 나갔다. 장터에 나간 유관순은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만세를 외쳤다. 선두에 선 유관순은 총검을 맞고 고꾸라졌다. 유관순의 몸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 내렸는데도 헌병은 소녀의 머리채를 잡고 발로 폭행을 가했다. 바로 뒤에 있던 소녀의 부모가 이 장면을 죄다 목격했다. 어린 딸이 헌병의 칼에 찔리고도 계속해서 얻어맞자 부모님은 통곡하면서 그 뒤를 따라갔다. 그러면서도 부모님은 "대한독립 만세!"를 계속 외쳐대며 절규했다.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는 일제 헌병이 쏜 총에 맞아 숨지고 말았다.

   서대문형무소 지하감옥에 투옥된 유관순은 쉴 새 없이 만세를 외쳤다. 그때마다 며칠씩 밥을 굶기고 고문을 가하는데도 그는 무조건 만세를 불렀다. 징역형을 받았기 때문에 석방이 예정된 상태였는데도, 그는 그런 희망을 품지 않고 무조건 만세를 외치다가 가혹한 고문을 받고 순국했다.
유관순은 직업적인 투사도 아니고 준비된 운동가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여학생이었다. 그러나 불우한 시대는 평범한 소녀의 정치의식을 일깨웠고 그가 시대의 모순에 용감히 저항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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