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드라마 <전우치>는 주인공 전우치가 실존인물이라는 점만 빼면 거의 다 창작의 산물이다. 그나마 실제 사실과 가까운 것은 젊은 임금의 강제 이혼에 관한 이야기다.
 전우치가 살던 시대의 임금은 중종이었으며, 중종과 억지로 이혼한 여성은 신씨였다. 신씨의 아버지인 신수근은 폐위된 연산군의 매부였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옹립한 중종반정(이하 '반정')의 주역들은 거사 전에 신수근에게 동참을 요청했다. 하지만 신수근은 제안을 거절했다. 이 때문에 반정 주역들은 거사 직후에 중종과 신씨의 이혼을 요구했다. 연산군을 지지한 사람의 딸을 왕비로 모실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씨는 왕후에 책봉되지도 못한 상태에서 남편과 헤어져야 했다. 그가 단경왕후로 추증된 것은 먼 훗날인 1739년의 일이다.
 강제로 이혼당한 신씨는 남편과 소통할 길이 전혀 없었다. 반정 주역들의 세상이 됐기 때문에, 그들의 미움을 산 신씨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신씨는 남편이 자기를 잊어버릴까봐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서울 인왕산 동편의 치마바위다. 인왕산은 경복궁 광화문의 왼쪽에 있는 산이다. 이 산에는 꽤 너른 바위가 있다. 신씨는 그 바위에 자기의 치마를 널어놓았다. 남편에게 자기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런 사연 때문에 이 바위는 치마바위라 불리게 됐다.
 중종도 신씨와의 이혼이 서러웠을 것이다.하지만 중종은 그냥 마음뿐이었다. 신씨와 이혼 후 9년 뒤에 재결합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신씨와 이혼한 이듬해에 중종은 장경왕후 윤씨(제12대 인종의 어머니)와 혼인했다. 그런데 중종반정 9년 뒤인 중종 10년 3월 2일(양력 1515년 3월 16일)에 장경왕후가 사망하자, 개혁파 선비 그룹인 사림파 쪽에서 신씨 복귀 운동을 벌였다.
구세력인 반정 주역들에게 불만을 품은 사림파는, 구세력이 쫓아낸 신씨를 복귀시킴으로써 그들에게 타격을 입히고자 했다.
 신씨 복귀운동의 총대를 멘 사람들은 전라도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이었다. 이들은 중종과 신씨의 재결합을 촉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반정 주역들은 처음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중종이 아무리 전처를 그리워할지라도 재결합을 시도하지는 않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구세력 내의 강경파가 실수를 범했다. 박상과 김정을 그냥 둬도 되는데, 이들은 두 사람을 탄핵하고 유배지로 보내는 과잉 조치를 취했다. 이 조치가 내려진 것은 중종 10년 8월 24일(1515년 10월 1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틀 전인 중종 10년 8월 22일(1515년 9월 29일)에 34세의 나이로 과거시험에 합격한 청년이 있었다. 이 청년은 유배 조치에 분노를 품었다. 임금 부부의 재결합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고 귀양까지 보내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청년은 2개월 뒤인 중종 10년 11월 20일(1515년 12월 24일)에 사간원 종6품 벼슬인 정언에 임명됐다. 그가 바로, 16세기가 낳은 걸출한 개혁가인 조광조다. 
 사림파의 일원인 조광조는 "정당한 언로를 막는 사헌부와 사간원 전체를 해임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사간원에 들어간 지 이틀밖에 안 되는 신참 관료가 사간원은 물론이고 사헌부 전체의 교체를 요구한 것이다.
너무나 황당하고 당돌한 요구였다. 더 놀라운 것은 중종이 그 상소를 수용했다는 점이다. 중종은 조광조를 제외한 사간원?사헌부 관료들을 전부 다 해임했다. 청년 조광조가 정국의 핵심으로 부각되는 순간이었다. 조광조의 개혁파 정권은 이렇게 중종의 신임 속에서 출범했다.
 구세력이 포진한 사간원, 사헌부 관료들을 해임하고 젊은 사림파인 조광조에게 힘을 실어준 사실에서 나타나듯이, 당시의 중종은 즉위 당시와 달리 비교적 강력했다. 구세력에 타격을 입힐 수 있을 만큼의 권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중종은 신씨와의 재결합을 추진하지 않았다. 장경왕후가 죽고 2년 뒤에 그는 장경왕후의 7촌 조카인 문정왕후 윤씨와 재혼했다. 반정의 정당성이 훼손될까봐 신씨와는 절대로 재결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조광조의 요구를 수용한 것은, 그 김에 반정 주역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조광조도 그에게 이용을 당한 셈이다. 
 종종은 하루에도 몇 번씩 치마바위를 쳐다보고 눈물을 흘렸을 수는 있지만, 그는 마음이 약해지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인왕산 치마바위보다도 왕궁의 보좌가 훨씬 더 중요했다.

저작권자 © 주간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