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에 혜성처럼 등장한 '왕'이 공민왕이라면, 혜성처럼 등장한 '신하'는 최영이었다. 왜구를 격퇴한 공로로 우달치(왕의 경호원)가 되어 중앙 무대에 데뷔한 최영은 공민왕 및 우왕 시대에 각종 대내외 전쟁에서 무패의 전적을 기록하고 왕조를 사수하여 고려의 국민영웅으로 떠올랐다.
최영의 위상이 최고조에 도달한 시점은 <고려사> 신우 열전에 따르면 우왕 14년 정월이었다. 양력으로는 1388년 2월 8일에서 3월 8일 사이였다. 최영이 일흔세 살 때였다. 이때 최영은 이성계를 끌어들여 집권당 수뇌부인 이인임, 임견미, 염흥방을 제거하는 친위 쿠데타를 단행했다. 이로써 우왕의 권력은 물론이고 최영의 위상까지 절정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렇게 나이 70세를 넘어 전성기를 맞이한 최영은 1년도 채 안 된 우왕 14년 12월(1388년 12월 29일~1389년 1월 27일)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친위 쿠데타 직후에 명나라가 영토분쟁을 도발하자, 이를 명분으로 만주정벌(요동정벌)을 추진했다가 이성계의 쿠데타를 막지 못해 권력도 잃고 목숨도 잃은 것이다.
그로부터 약 250년 전인 1135년에 개혁파 승려인 묘청이 김부식 등의 보수파에 맞서 북진운동을 추진했다가 좌절된 뒤로, 한반도에서 만주정벌이라는 목표를 명확히 내걸고 군대를 일으킨 인물은 최영이 처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영의 시도는 한국사에서 매우 뜻 깊은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꿈은 좌절됐다. 최영의 명령을 받고 압록강 위화도까지 군대를 몰고 갔던 이성계는 '소국이 대국을 칠 수는 없다'느니 '비가 많이 와서 불가능하다'느니 하며 시간을 끌다가 군대를 개경 쪽으로 확 돌렸다. 이 '불법 유턴'을 막지 못해 만주 정벌의 꿈과 더불어 최영의 운명도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이성계가 내건 명분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것은 '소국이 대국을 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힘으로는 만주 정벌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논리는 과연 맞는 것이었을까? 그의 말처럼 최영은 불가능한 꿈을 꾸었던 것일까?

최영의 만주수복은 충분히 가능했던 시나리오
최영의 만주수복운동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고려가 이겼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명나라가 최선을 다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고려가 한번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런 확신이 있었기에 최영이 5만 대군을 동원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이성계 역시 겉으로는 만주정벌 불가론을 내세웠지만, 이것이 그의 진심은 아니었다. 이성계 역시 조선을 세우자마자 정도전과 함께 만주정벌운동을 전개하지 않았나? 이성계 역시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가 1388년에 만주정벌을 거부한 것은, 당시로서는 만주정벌에 내몰리기보다는 쿠데타를 벌이는 편이 훨씬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최영의 만주수복운동은 결코 불가능한 꿈이 아니었다. 일흔세 살의 최영이 민족적 숙원인 만주수복에 나선 것은, 그가 생각해도 그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가 쿠데타를 막을 능력만 있었다면, 만주수복의 꿈은 그의 시대에 성취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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