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을 다룬 사극에서 거의 예외 없이 공통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흥선'대원군'이 되기 이전, 그러니까 흥선'군' 시절 이하응의 모습이다. 아들인 고종을 왕으로 만들기 이전의 이하응은 전형적인 천덕꾸러기로 묘사되고 있다.  이런 이미지는 MBC <닥터 진>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나고 있다. 이하응(이범수 분)이 고위층 인사들 틈에서 술을 얻어먹다가 수모를 당하는 모습이 나왔다. 동석자가 안주를 연못에 던지고, 이하응이 얼른 뛰어들어 건져 먹는 장면이었다. 똥개 훈련시키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었다.  드라마나 소설에서 항상 이렇게 묘사되기 때문에, 우리는 흥선군 시절의 이하응이 아주 비참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인지, 학자들의 명의로 정리된 인터넷 백과사전들에서도 이하응은 어김없이 천덕꾸러기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어딘지 좀 이상하지 않은가? 고귀한 왕족이 하층민 대우를 받다가 어느 날 갑자기 대원군(임금의 아버지)이 되어 권력을 독점하고 개혁을 추진했다? 이처럼, 고귀한 자가 시련을 겪다가 정상에 올라서는 내용은 영웅담의 단골 스토리가 아닌가?   이상한 구석은 이뿐만이 아니다.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던 인물이, 아들이 왕이 됐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있을까? 영구나 맹구 같던 인물이 갑작스레 국정의 중심에 서서 개혁을 추진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긴장감을 느낄 수 있을까?

  사실, 우리가 갖고 있는 이하응의 이미지는 거의 다 소설이나 드라마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1863년에 고종이 왕이 되기 이전에 그가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지 판단하려면, 기존의 선입견을 모두 버리고 사료 속으로 들어가 볼 필요가 있다.  이하응의 행동은 모범적이었다  고종이 즉위하기 11년 전인 철종 임금 때였다. 소설이나 드라마대로라면, 이하응이 한창 치욕과 수모를 당하고 있어야 할 시기다. 그런데 이런 선입견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철종 3년 7월 10일자(1852년 8월 24일) <철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상소문이 담겨 있다.

  "종친(임금의 친족)들이 한결같이 남연군, 흥인군, 흥선군을 본받도록 하소서."
 남연군은 이하응의 아버지이고, 흥인군은 형이다. 상소문을 작성한 사람은 홍문관 부교리(종5품) 김영수다. 홍문관은 엘리트 선비들이 포진한 학술 기관으로서 선비들의 여론을 임금에게 전달하는 기관 중 하나였다. 따라서 이 상소는 흥선군 3부자에 대한 선비들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김영수가 '흥선군을 본받도록 하소서'라고 상소한 것은 이하응의 행동이 모범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종친의 신분을 남용하는 일부 왕족과 비교할 때 흥선군은 아주 적절하게 처신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상소에서 나타나는 것은, 세상의 눈치를 보며 스스로 조심하는 이하응의 모습이다. 이것은 존경받을 만한 행동이지, 결코 무시 받을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이런 행동의 소유자한테, "받아먹으라!"며 안주를 연못에 던질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당시 사람들이 이하응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는 점은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도 나타난다. 구한말의 정치상황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의 권1에 따르면, 흥선군의 집인 운현궁에 왕기(王氣)가 떠돈다는 소문이 이미 철종 때부터 널리 퍼졌다고 한다.   이처럼 이하응 집안에서 차기 대권주자가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진 상황에서, 과연 시정잡배들이 그를 함부로 다룰 수 있었을까? 시정잡배들은 물론이고 고위층 인사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하응이 우리 머릿속에서 천덕꾸러기 이미지를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그 시작은 1930년대 조선일보에 연재된 김동인의 장편소설 <운현궁의 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하응을 영웅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은 <운현궁의 봄>은 흥선군 시절의 이하응을 아주 초라하게 묘사했다. 이 작품에는 이하응을 '상갓집 개'로 표현한 구절이 17회나 나온다. 같은 뜻의 한자어인 상가구(喪家狗)라는 표현까지 합하면 총 18회다. 그중 한 구절은 이러하다.  "상갓집 개와 같이 가는 곳마다 구박을 받는 이 공자는, 그래도 행여 구박하지 않는 고마운 세가(권세가)가 있지 않나 하여, 대목의 바람 찬 거리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김동인은 상갓집 개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의 뇌리에 '상갓집 개'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함으로서 흥선군 시절의 이하응에게 천덕꾸러기 이미지를 부여했던 것이다.
 덕분에, 이하응은 '고귀한 혈통으로 태어나 시련을 겪다가 정상에 올라선다'는 전형적인 영웅의 이미지를 갖추게 되었다. 김동인 때문에 체면은 구겼지만, 덕분에 영웅의 반열에 올라선 셈이다.  오늘날 우리가 '흥선군 이하응' 하면 아주 불쌍한 사람을 연상하는 것은 이처럼 문학작품의 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들뿐만 아니라 학자들까지도 그 같은 이미지를 아주 당연시하고 있으니, 문학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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