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품은 달>의 이훤(김수현 분)은 사극에서 보기 드문 로맨틱 군주다. 애인을 기다려주는 사람은 많아도, 죽은 애인까지 기다려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드라마 속 이훤은 그렇게까지 했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죽었을 것으로 착각한 애인을 기다려준 것이다. 그렇지만, 애인이 살아 있는 사실을 모르고도 그렇게까지 기다려주었으니, 그는 이제껏 나온 사극 인물 중에서 가장 로맨틱한 군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에는 이훤 같은 로맨틱 군주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왕실과 조정에서 "임금은 여자한테 신경을 쓰면 안 된다"고 수없이 세뇌시켰지만, 그래서 대부분의 군주들은 그런 충고를 잘 따랐지만, 집요한 세뇌작업에도 '사랑 본능'이 씻기지 않은 군주가 있었다. 제24대 헌종(정조의 증손자)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조선시대에 왕비나 세자빈을 선발한 것은 주로 왕실 여성들이었다. 임금 본인 혹은 세자 본인은 심사장(간택 자리)에 나갈 수도 없었고 배우자를 직접 고를 수도 없었다. 헌종의 첫 번째 결혼 때까지만 해도 이 원칙은 잘 지켜졌다.

 그런데 첫번째 왕후인 효현왕후 김씨를 잃은 지 1년 뒤인 1844년. 열일곱 살의 나이로 두 번째 왕후를 맞이할 때, 헌종은 자기 눈으로 직접 신붓감을 보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그래서 이례적으로 신랑이 참석한 가운데 신붓감 심사가 진행되었다.

 처음엔 "참석만 할게요"라고 고집을 피우던 헌종은 최종 심사장에서 "제가 직접 고를게요"라며 또다시 고집을 부렸다.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연구>에 수록된 구한말 궁녀들의 증언에 따르면, 최종 후보 중 하나인 네 살 연하의 김씨 소녀가 헌종의 눈을 확 끌어당겼다고 한다. 하지만, 헌종은 김씨 대신 홍씨 소녀와 결혼해야 했다. 이 여인이 효정왕후 홍씨다. 홍씨가 선택된 것은 헌종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홍씨 가문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헌종과 홍씨의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이들은 첫날밤부터 각방을 썼다. 헌종이 김씨 소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헌종은 김씨와의 짧은 마주침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을 지우지 못했던 것이다.
 3년 뒤인 1847년, 스무 살이 된 헌종은 <해품달> 이훤처럼 행동을 개시했다. 김씨를 왕후로 들일 수 없다면 후궁으로라도 들이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는 홍씨가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을 핑계로 후궁 간택을 추진했고, 결국 김씨를 후궁으로 맞이하는 데 성공했다. 이 여인이 김경빈(경빈 김씨)이다.

  헌종은 왕실의 반대에도 끝끝내 고집을 피워 '재수' 끝에 사랑을 성취했다. 이훤처럼 죽은 애인을 기다려주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이만하면 헌종도 로맨틱 군주에 낄 수 있을 것이다. 정조 이후의 순조?헌종?철종 시대에는 정치적으로 강력한 군주가 출현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로맨스 분야에서는 헌종이 강력한 군주의 면모를 과시했다.

  조선왕조의 대표적 로맨스 중 하나인 헌종과 김경빈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장소가 있다. 창덕궁 낙선재가 바로 그곳이다. 낙선재는 헌종이 김경빈에게 선사한 건물이다.  헌종이 낙선재에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가는, 이곳의 장식 무늬가 어느 것 하나도 똑같은 게 없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무늬 하나하나에 지극정성을 쏟아 부은 것이다. 임금의 열의가 없었다면, 후궁의 처소에 이렇게까지 정성을 쏟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처럼 쉼 없이 이어지는 낙선재의 꽃담을 보노라면, 애인과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손 모아 기도한 헌종의 소망을 읽을 수 있다. 이들의 사랑은 헌종의 요절로 605일 만에 끝났지만, 그래서 대망의 1000일을 채우지는 못했지만, 이들의 사랑이 남긴 흔적만큼은 낙선재를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울 시내에 나갔다가 시간이 난다면 낙선재 마루에 걸터앉아, 저 태양을 바라보며 <해품달> 이훤처럼 사랑에 목숨을 건 헌종의 로맨스를 한번쯤 음미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런 뒤, 창덕궁 정문에서 나와 서쪽의 경복궁과 인왕산을 바라보면서, 대부분의 임금들이 중종처럼 사랑보다는 권력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애환을 헤아려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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