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과거의 지배적인 종교들을 통해 그 시대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신선교가 지배한 시대(고조선 시대), 신선교, 불교, 유교가 지배한 시대(남북국 이전), 불교, 유교, 신선교가 지배한 시대(남북국~고려), 유교, 불교, 신선교가 지배한 시대(조선 전기), 유교, 불교가 지배한 시대(조선 후기)를 이해하려면, 각각의 종교를 통해 그 시대에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왕실과 서민층에서는 불교, 신선교가 권위를 갖고 있었다. 또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서 묘사되는 바와 같이, 신선교를 신봉하는 무녀들이 성수청이란 국가기관을 형성했다. 조광조에 의해 혁파된 소격서 역시 신선교 계열의 국가기관이었다.  지배적인 종교들을 통해 각각의 시대를 들여다 볼 경우, 역사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올 것이다. 또 그렇게 할 경우, 우리는 역사 속 인물들의 '이상한 행동들'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화랑 김유신의 '이상한 행동들'이 자연스레 이해될 것이다.

  화랑이 된 지 2년 뒤인 611년, 열일곱 살의 김유신은 수행을 목적으로 중악산에 올랐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김유신은 "저에게 능력을 주십시오"라며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그랬더니 신비한 노인이 나타나 술법을 전수해주고 사라졌다. 김유신이 2리 정도 따라갔으나, 노인은 사라지고 오색구름만 찬란했다.   이듬해인 612년, 김유신은 또다시 산상의 수행에 나섰다. 이번에는 보검을 들고 열박산에 올라 향을 피우며 하늘에 기도했다. 그랬더니 하늘에서 내려온 광채가 보검을 감싸고 돌았다. 칼이 저절로 움직일 듯했다고 '김유신 열전'은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편에서는 화랑들이 얼굴을 곱게 화장하고 산천을 유람하면서 수행을 쌓았다고 말했다. 이런 수행 방식은 유교, 불교의 것이 아니다. 남자 얼굴에 알록달록한 분칠을 하는 것은 유교, 불교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또 불교 수행자도 산속에서 수행하기는 하지만, 산천을 전문적으로 유람하지는 않는다. 화랑의 수행 방식은 전형적인 신선교의 그것이었다.  화랑들이 특히 산을 중시한 것은, 상제(上帝)가 산을 통해 인간 세상에 강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유신처럼 이 산 저 산을 유람하며 하늘에 기도를 올렸던 것이다. 김유신이 신선교 수행자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가 신비한 노인과 신비한 빛을 봤다는 기록이 자연스레 이해될 것이다.

  김유신 역시 환상을 통해 무의식 속의 신적 존재를 발견했고 그것을 계기로 영적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김유신 열전'의 일화가 전혀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적어도 김유신의 두 눈에는 신비한 노인과 신비한 빛이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유신은 그런 계기에 힘입어 '영험한 화랑'이 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영험한 샤먼' 혹은 '영험한 박수무당'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그런 인물이었다고 생각하면, 그가 심리전술에 특히 능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객관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쟁을 기묘한 심리전술을 통해 뒤집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김유신 같은 화랑들이 오늘날의 무당과 완전히 똑같았을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당시의 샤먼은 국가의 핵심 지식인으로서 국가 경영에 참여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무속인들과 달리 국가적으로 상당한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영적 측면에서는 과거의 무속인이나 현재의 무속인이나 다를 것이 없지만, 지위, 학력, 경제력이라는 측면에서는 전자가 후자를 압도적으로 능가했다.  이처럼 유교, 불교뿐만 아니라 신선교 역시 한민족을 지배한 시기가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역사서를 읽으면, 우리는 역사의 참모습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김유신을 비롯한 수많은 인물들의 행동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의 이미지를 보다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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