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우리는 외세가 쳐들어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에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외세에 맞서 용감히 싸워야 한다’고 답변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상의 인물을 평가할 때도 외세의 침략에 맞서 용감히 싸운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 같은 사람들을 매우 존경한다.

 그런데 외세에 맞서 용감히 싸웠기 때문에 당연히 칭찬을 들어야 하는데도, 칭찬을 받기는커녕 한심한 인물로 매도당하는  인물이 있다.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의 침공을, 신미양요(1871) 때 미국의 침공을 물리친 흥선대원군 이하응(이하 '대원군')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외세에 맞서 용감히 싸웠지만 비난받는 '흥선대원군' 1545년 이후부터 1800년까지 전 세계에서 생산된 13만7000톤의 은(銀) 중에서 6만 톤(44%)은 청나라에 유입되었다. 당시에는 은이 지금의 금이나 달러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은의 유입은 무역수지 흑자를 의미했다.

 청나라는 3대 수출품인 차, 비단, 도자기로 세계시장을 석권한 반면, 영국?미국?프랑스 등 서양열강은 마땅한 주력 품목이 없어 대(對)중국 무역에서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서양열강이 아프리카?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벌어들인 돈이 중국에 끊임없이 흘러들어가는 구도가 계속 유지되었다.

 나중에 서양열강이 아편 밀매로 방향을 돌린 것은, 정상적인 상품으로는 무역적자를 타개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이 아편전쟁(1840)을 일으킨 것은, 청나라가 그나마 아편무역마저 허용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서양열강은 여세를 몰아 불평등조약을 강요했고, 그렇게 해서 통상관계의 룰(rule)을 바꾼 뒤에야 만성적인 무역적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서양열강은 일본을 상대로도 똑같은 방법을 구사했다. 그들은 함포를 앞세워 일본을 위협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여 자국에 유리한 통상관계를 만들어냈다. 당시의 서양열강은 조폭과 다를 바 없었다. 이렇게 서양열강이 비열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모습을 지켜본 대원군으로서는 그들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은 서양열강에 대해 우호적 입장을 견지했다. 아니, 그가 서양에 대해 우호적이었다고? 믿기지 않을지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고종 2년 8월 17일자(1865년 10월 6일) <고종실록>에 따르면, 실권자인 대원군은 경상도 해안에 표류한 미국인 3인을 구호하고 식량과 선박까지 제공하면서 귀국의 편의를 봐주었다. 또 조선 정부의 공식 일기인 <일성록>에 따르면, 고종 3년 중반에 미국 상선 서프라이즈호가 평안도 철산에 표류하자 대원군은 이들을 인도적으로 구호한 뒤 안전하게 돌려보냈다. 다만, 고종 3년에 발생한 미국 선박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훗날 개화파 지도자가 될 평양감사 박규수가 제너럴셔먼호를 격침한 것은 이 선박이 조선 영역을 불법 침입했기 때문이다. 이 배는 대동강을 따라 평양까지 깊숙이 들어갔다. 그것도 모자라 조선 관리를 폭행하고 감금하기까지 했기에, 관군은 물론 평양 백성들까지 나서서 이 배를 불태워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대원군은 '조선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한, 서양열강을 우호적으로 대하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당시 동아시아 해역에서 조난을 당하는 서양 선박들이 꽤 많았기 때문에, 이런 선박들에 대해 인도적 구호를 아끼지 않겠다는 대원군의 태도는 서양열강이 고마워 할 만한 것이었다. 다만, 대원군은 통상관계에 대해서만큼은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었다. 서양열강에 의해 중국 시장이 침탈되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았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그런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한, 서양열강을 우호적으로 대하겠다'는 조선 정부의 공식 입장을 무시한 나라 중 하나가 미국이었다. 미국은 1871년 3월 7일자 서한을 통해 '문호를 개방하지 않으면 평화롭지 못한 사태가 초래될 것'이라며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감행했다. 문호를 개방하라는 말은 시장을 개방하라는 뜻이었다. 신미양요는 이렇게 해서 시작됐다.  미국 측의 시장 개방 요구에 대해 조선 측은 고종 8년 2월 25일 자(1871년 4월 14일)자 답신에서 "미국과 통상관계는 맺지 않겠지만, 미국 선박이 곤란에 처하면 기꺼이 돕겠다"는 견해를 다시 한 번 천명했다. 미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싶지 않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이 서신을 받기도 전에 함대를 출동시켰다. 중국 상해(상하이)에서 출발한 미군 함대는 일본 나가사키에 들러 일본 정부의 협력 하에 출정 준비를 마친 뒤 고종 8년 3월 27일(1871년 5월 16일)에 조선을 향해 출발했다. 양력으로 3월 7일 자 서한을 발송한 지 2개월여 만에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당시 한미 양국은 중재자인 청나라를 통해 문서를 교환했기 때문에, 서신 한 통이 상대방 쪽에 도달하는 데 보통 1개월 정도 걸렸다. 그래서 서신을 발송한 쪽이 답신을 받으려면 3개월 정도는 기다려줘야 했다. 서신을 받은 쪽에서 내부 논의를 거쳐 답신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이 2개월여 만에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은 애초부터 조선의 답신을 기다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들은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미국이 일방적으로 시장개방을 요구하고 전쟁까지 일으켰으니, 대원군으로서는 당연히 강경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유부단하게 대처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한심한 태도가 아닌가.  그는 강경하게 대처했고, 결국 미국을 내쫓았다. 청나라와 일본은 서양 군함 앞에 굴복했지만, 조선만큼은 굴하지 않았다. 조선이 프랑스를 꺾은 데 이어 미국까지 꺾은 것은 당시로서는 세계적인 사건이었다. 동아시아 전체가 허무하게 굴복하는 분위기 속에서 조선만큼은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런 쾌거의 주역이 바로 대원군이었다.  그런데 일부 한국인들은 그런 대원군을 무조건 비판하고 있다. 서양의 장점을 배우려 하지 않고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 서양을 배척했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다.

  하지만, 대원군과 조선 정부는 최선을 다했다. 경제적 이익이 없다고 판단했기에 시장개방 요구를 거부했지만, 그들은 곤경에 처한 미국 선박들을 구조했고 미국에 대해 우호적 제스처까지 취했다.  이런 대원군이 '우물 안 개구리'니 '꽉 막힌 국수주의자'니 하는 비판을 받을 이유가 있을까. 다짜고짜 함포를 쏘아대는 외세 앞에서 그냥 백기를 들어야 했을까. 그런 상황에서 위정자가 내릴 수 있는 선택은 항복 아니면 항전이다. 대원군은 항복을 택할 수 없었기에 항전을 택한 것이다.   만약 대원군이 미국이 아닌 러시아나 중국을 물리쳤다면, 오늘날 그는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훗날 한반도 남부를 장악하게 될 미국을 건드렸다는 것이 그의 '결정적 실수'였다.  외세의 침공에 맞서 용감히 싸운 인물들이 칭송을 받는 한국 사회에서, 미국을 물리친 흥선대원군 이하응만큼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 '불편한 진실.' 흥선대원군이 물리친 미국이 여전히 한반도 남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는 이 불편한 현실이 그와 같은 불편한 진실을 낳는 원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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