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뿌리 깊은 나무>에서, 훈민정음 반포를 앞둔 세종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수렁에 빠졌다. 몇몇 측근을 제외하고는 조정 전체가 새로운 글자에 대해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사대부의 천하'를 꿈꾸는 비밀조직 밀본의 배후 조종 하에 조정 전체와 선비들이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드라마 속의 조정 관료들은 사실상 총파업에 돌입했다. 그들은 출근 대신 시위를 선택했다. 대신들은 임금과 신하의 학술 세미나인 경연에도 불참했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격렬히 반대하는 것은, 새 글자로 인해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드라마 속 세종은 훈민정음 때문에 자칫 왕권까지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에 처했다.

  훈민정음 창제는 한자 중심의 문자생활에 대한 도전이고 혁신이었다. 하지만, 드라마 내용은 부분적으로만 사실과 부합할 뿐이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 반대 목소리가 강력했던 것은 사실이다. 실학자 이긍익이 편찬한 역사서인 <연려실기술> 권3에서는 "그때 주상께서 언문을 창제하자 집현전 선비들은 불가하다는 뜻을 집단적으로 표시했으며, 심지어는 상소를 올려 극단적으로 논의한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극단적으로 논의한 사람들'이란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을 지칭한다.

  그런데 최만리 등에 대한 세종의 대응을 보면, 이 문제가 조정을 파국으로 몰고 갈 정도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세종 26년 2월 20일자(1444년 3월 9일)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를 강력히 반대한 최만리,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을 의금부에 가두었다가 다음 날 곧바로 석방시켰다. 이 중에서 추가적인 처벌을 받은 것은 김문, 정창손 뿐이었다.

  이런 사례에서 알 수 있듯, 훈민정음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컸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 인한 파장이나 후폭풍은 드라마에서처럼 강력하지 않았다. 세종이 반대론자들을 가두었다가 곧바로 풀어준 데서도 그런 분위기가 잘 나타난다.   사대부들도 감탄하게 만든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사실,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훈민정음을 수긍하는 분위기가 존재했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의 반감을 표출했지만, 얼마 안 있어 그들도 훈민정음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고 머리가 있기 때문에, 훈민정음의 가치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뿐만 아니라 조선의 사대부들도 중국 글자만 갖고는 문자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을 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사대부들도 얼마 안 있어 훈민정음을 보조적인 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상당수의 선비들은 언문 해설서를 옆에 두고 한문 서적을 공부하곤 했다.  조선 중기의 유명한 문장가인 어우당 유몽인은 중국 역사서인 <십구사략>을 배울 때 문장 해석이 잘되지 않아서 "언문 해석을 참조했다"고 저서인 <어우야담>에서 회고한 바 있다. 유몽인 같은 대가도 언문 해석을 보면서 한문 서적을 배웠다면, 여타 선비들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일부의 극렬 반대론자들만 제외하고 조선시대 사람들은 훈민정음을 비교적 묵묵히 받아들였고, 필요한 경우에는 훈민정음을 도구로 혹은 한자?훈민정음?이두를 도구로 문자생활을 영위했다. 이런 점을 본다면, 훈민정음에 대해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이는 드라마 속의 풍경이 현실과 상당히 동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훈민정음은 열렬한 환영의 대상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열렬한 거부의 대상도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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