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 하면 연상되는 것은 '삼천궁녀'다. 의자왕이 삼천궁녀와 더불어 질펀하게 놀다가 나당연합군에게 나라를 잃었고, 그 때문에 부여 백마강변의 낙화암에서 삼천궁녀가 스스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사실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하지만, 삼천궁녀 이야기가 한낱 낭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자료들 역시 매우 충분하다. 그중 세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백제 인구로는 도저히 삼천궁녀를 배출할 수 없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편을 따르면, 멸망 당시 백제의 가구 숫자는 76만 호(戶)였다. 1호당 인구는 적으면 3명, 보통은 4~5명, 많아야 7명이었다. 백제 멸망 당시의 1호당 인구를 4~5명으로 추정할 경우, 백제 인구는 304만 명에서 380만 명 정도였다고 계산할 수 있다. 멸망 당시의 궁녀가 3000명이었다면 인구 1000명당 1명은 궁녀였다는 말이 되는데, 이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멸망 당시의 백제보다 영토나 인구 면에서 훨씬 더 컸던 조선에서도 삼천궁녀는 절대로 나오지 않았다. 실록에서 궁녀 숫자를 살펴보면, 태종 때인 15세기 초반에는 '수십 명', 세종 때인 15세기 초중반에는 '100명 미만', 성종 때인 15세기 후반에는 '최소 105명', 인조 때인 17세기 초중반에는 230명이었다.  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되면서까지 온갖 반발을 무릅쓰고 궁녀 증원을 감행한 영조(재위 1724~1776) 때의 궁녀 숫자는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에 따르면 684명이었다. 이 기록은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

  영조 때의 조선 인구는 1600만~1800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이 인구에서 궁녀 684명을 선발했으므로, 인구 2만3000명~2만6000명당 궁녀 1명을 뽑았다는 말이 된다.  멸망 당시의 백제 인구를 304만~380만 명으로 추정할 경우, 인구 2만3000~2만6000명당 궁녀 1명을 뽑았다고 가정하면, 백제의 실제 궁녀 숫자는 아무리 많아도 170명을 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둘째, 고대 동아시아에서 '삼천'이란 숫자가 실제로 3000을 가리키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만큼 많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수십, 수백, 수천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따름이다. 고대 동아시아인들은 특히 그랬다. 이들은 '삼천'이란 숫자를 문자 그대로가 아닌 추상적 의미로 이해했다. 의자왕이 삼천궁녀를 거느리다 죽었다는 이야기를 최초로 지어낸 사람이나 최초로 들은 사람들 역시 '삼천'을 그런 의미로 이해했을 것이다.

 셋째, 삼천궁녀가 실존했음을 입증할 만한 역사적 근거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는 기본적으로 사료를 토대로 구성된다. 사료가 없는 경우에는, 합리적으로 판단 가능한 범위 안에서 추정을 통해 역사를 구성할 수 있다.  하지만, 삼천궁녀 이야기의 경우에는, 사료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합리적 추정을 가능케 하는 단서도 전혀 없다. <삼국사기> '의자왕 편'에서 백제 멸망 4년 전에 의자왕이 궁녀들과 술을 많이 마신 적이 있다고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존재를 연결시킬 수는 없다.  이처럼, 삼천궁녀의 존재를 입증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는데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마치 진짜처럼 이야기하고 있으니, 한국사에서 이보다 더한 낭설은 아마 없을 것이다. 신화도 전설도 설화도 아닌, 한낱 낭설에 불과한 것이다.  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할 수도 없는 삼천궁녀 이야기를 갖고 백제 멸망의 원인을 논한다면, 우리는 백제의 흥망성쇠로부터 아무런 구체적인 지식도 얻지 못할 것이다. 백제가 멸망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군사적 원인들을 실증적으로 분석해야만, 백제의 흥망성쇠로부터 내일을 위한 교훈을 끄집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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