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대왕(한석규 분)과 궁녀 소이(신세경 분)는 무척 애틋한 관계다. 소이는 임금을 모시는 시녀가 아니라 제5왕자인 광평대군을 모시는 시녀다. 그런데도 세종은 침전에서 소이와 단둘이 시간을 보낼 때가 많다.  이들이 한 방에서 단둘이 있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니, 주변 사람들은 이들의 관계에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세종과 소이의 애틋함은 드라마 속 허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만약 조선시대 왕궁에서 이런 일이 실제로 발생했다면, 임금과 궁녀는 클린턴과 르윈스키 이상으로 구설수에 휘말렸을 것이다. 조선시대 왕궁의 윤리관을 살펴보면, 세종과 소이의 행동이 얼마나 대담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왕과 세자는 궁녀들을 마음대로 사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왕과 세자가 궁녀를 사귀는 데는 윤리적 장애물이 존재했다. 어떤 궁녀를 함부로 건드리면, 뒷말이 나기 일쑤였다. 영조-사도세자-정조 3대에 벌어진 사례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혜경궁 홍씨(사도세자의 부인)가 남긴 회고록인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대단한 바람둥이였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개혁 성향을 띠었지만, 이성 관계에서는 숱한 염문을 뿌렸다. 사도세자는 궁녀가 마음을 허락하지 않으면 매질을 해서라도 자기 여자로 만들었다. 그러다가도 마음이 금세 돌변해서 어느새 다른 궁녀를 가까이하곤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영조는 아들의 행동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았다. 칭찬할 만한 행동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처벌할 만한 행동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조를 분노케 한 결정적 사건이 있었다. 사도세자가 인원왕후전(殿) 소속의 침방나인(바느질 담당)이었던 빙애를 가까이 한 사건이었다. <한중록>에 따르면, 영조 33년 11월 11일(1757.12.21) 이 사건을 인지한 영조는 매우 격노하여 사도세자를 급히 불러들였다. "네가 감히 그리할 수 있느냐?"고 영조는 분개했다. 사귀지 말아야 할 궁녀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사도세자와 빙애가 사귈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빙애는 영조가 가까이 하는 궁녀였을까? 아니다.영조는 빙애의 얼굴도 몰랐다.  영조가 격노한 것은 빙애가 인원왕후전 소속의 궁녀였기 때문이다. 인원왕후는 인경왕후, 인현왕후, 장희빈을 이어 숙종(영조의 아버지)의 네 번째 중전이 된 여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원왕후는 사도세자에게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시녀를 건드리는 것은 할머니를 건드리는 것과 같이 불경스러운 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처음에는 빙애를 짝사랑하기만 했을 뿐, 쉽게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인원왕후가 사망하자마자 빙애를 자기 방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사도세자의 행위는 불륜으로 간주되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더라도 할머니의 궁녀를 건드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처럼 왕이나 세자일지라도 윗사람의 궁녀를 건드리는 것은 패륜으로 간주되었다.  인원왕후의 '물건'인 빙애는 어떻게 됐을까? 영조가 "빙애를 내놓으라!"고 하자, 사도세자는 "얘가 빙애입니다"라며 궁녀 하나를 내보냈다. 그것으로 이 문제는 마무리됐다. 이 시기에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다. 사실상의 왕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이 쉽게 무마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실상의 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빙애는 사도세자의 방 안에 숨어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영조는 빙애의 얼굴을 몰랐다. 세자궁 사람들이 굳게 함구했기 때문에, 빙애는 비교적 오랫동안 사도세자와 동거할 수 있었다. 빙애는 나중에 사도세자가 정신이상을 일으킬 때 그 옆에 있다가 세자의 칼날에 목숨을 잃었다.  이런 점을 보면, 궁녀 소이와 단둘이서 애틋한 감정을 나누고 있는 드라마 속의 세종이 좀 대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시녀를 자기 방안에 들이는 것은, 에로스 상황을 연출하든 안 하든 간에,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구설수에 오를 만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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