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벌 전투에서 맹렬히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계백 장군. 그는 MBC 드라마 <계백>에서 노예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정치범인 아버지와 연루된 어린 계백(이서진 분)이 죄인 신분으로 호송되던 중에 신라군에 붙들려 신라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 드라마의 설정이다.

 계백이 한때 노예로 전락했다는 것은 드라마 속의 허구에 불과하다. 비범한 인물이 고난의 과정을 거쳐 큰 업적을 이룬다는 것은 영웅 이야기의 필수 요소다. '노예로의 전락'이라는 설정은 계백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윤색하기 위한 것일 뿐, 역사적으로는 전혀 근거가 없으며,이를 사실로 믿기에도 너무 황당하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이 있다. 계백이 살던 시대에 노예란 것은 상당히 일반적인 '직업'이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노예의 처지가 그렇게까지 처참하지는 않았다. 고대 왕국들이 왜 그토록 열심히 전쟁을 했는가를 살펴보면 그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따르면, 의자왕 2년(서기 642년) 7월에 백제는 총사령관인 의자왕의 직접 지휘 하에 신라의 40개 성을 점령했다. 8월에는 백제 장군 윤충이 신라 대야성을 함락했다. 의자왕 3년(서기 643년) 11월에는 백제가 신라 당항성(경기 화성 일부)을 공격하려다가 철수했다. 의자왕 4년(서기 644년) 9월에는 신라 김유신이 백제의 7개 성을 빼앗았다. 이렇게 고대에는 몇 년이 멀다 하고 수시로 전쟁이 발발했다. 이렇게 자주 전쟁을 벌인 것은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본질적 목적은 농경지와 노동력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예컨대, 백제 윤충은 신라 대야성을 함락한 뒤 주민 1천여 명을 사비(충남 부여) 서쪽으로 옮겨놓았다. 또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는 미천왕 3년 9월(302.10.8~11.6)에 "(미천)왕이 군대 3만을 이끌고 현도군을 침공하여 8천 명을 포획하고 평양에 옮겨 두었다"고 했다.  전쟁포로가 된 점령지 주민들을 사비 서쪽과 평양으로 옮긴 것은 해당 지역의 농경지를 경작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비 인근 및 평양의 노동력 부족 사태를 해소하는 데 전쟁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노예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전쟁의 동기였던 것이다.

  점령국의 지배 하에 들어간 전쟁 포로들은 일종의 노예 취급을 받았다. 노예에게는 생산수단(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았다.  의자왕 초기의 전쟁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에는 노예 노동력의 확보를 목표로 한 전쟁이 빈발하다 보니, 여기서 양산된 노예들이 전체 노동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컸다. 이들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고 그 숫자도 적어진 조선 후기만 하더라도, 이들이 전체 국민 중에서 차지한 비중은 최소 30% 이상이었다. 따라서 고대에는 이 비중이 훨씬 더 높았으리라고 보는 게 이치적이다.

  노예가 최소 30% 이상은 되었다는 사실은 고대에서 노예를 흔히 볼 수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점을 본다면, 고대 사회에서는 노예가 꽤 일반적인 '직업'이었다고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사극에서는 이들이 사회적으로 극도의 멸시와 천대를 받은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그런 모습은 실제 역사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물론 이들이 열악한 조건에 놓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드라마에서처럼 과도하고 극단적인 모습을 보였다고는 볼 수 없다.

  드라마 <계백>에서는 계백의 영웅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계백이 한때 노예였다는 식의 설정을 만들었지만, 당시에는 노예란 것이 꽤 일반적인 직업이었으므로 단순히 노예 생활을 한 적이 있다는 점만 갖고는 주인공이 극단적인 고난을 겪었다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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