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최후의 날을 다루고 있는 MBC 월화드라마 <계백>에서는 계백과 의자왕의 관계가 특이한 인연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신라 선화공주와 백제 무왕의 아들인 의자왕이 왕자 시절부터 기득권층의 견제를 받았고, 그런 가운데서 선화공주 모자의 신변을 보호해준 인물이 계백의 아버지인 무진이었다는 것이다.  백제 기득권층은 ‘신라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을 왕으로 모실 수 없다’며 왕자 의자의 태자 책봉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선화공주 모자를 아예 제거해버리려 했다. 물론 드라마 속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의자왕이 신라 공주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기득권층의 견제를 받았다는 설정은 상당히 그럴싸하다.  그럼,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을까? 의자왕은 정말로 어려서부터 정통성 시비에 시달렸을까? 이런 의문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쟁점들을 검토해보자.

첫째, <삼국유사>의 서동요 설화
 이 설화를 통해, 무왕이 신라 여성과의 결혼으로 인해 고초를 겪었는지를 살펴보자. 서동이란 별명이 붙은 부여장(훗날 무왕)은 유명한 ‘얼짱’인 선화공주를 연모하게 된다. 선화공주는 진평왕의 딸이자 선덕여왕과 자매지간이었다. 부여장은 선화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신라 서라벌에 잠입한 뒤, 아이들에게 마를 선물로 주면서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는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 이 ‘19금(禁)’ 노래가 그 유명한 서동요다.

 설화에 따르면, 부여장은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행적을 남겼다. 진평왕에게 금괴 즉 정치자금을 제공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모아둔 황금을 지금의 전북 익산시 미륵산에 있던 사자사라는 사찰에 맡긴 뒤, 이 절의 주지가 그것을 진평왕에게 송부하도록 했다. 이런 내막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의 눈에는, 진평왕의 칭송을 받는 부여장이 그저 대단하게 보였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부여장이 집권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이처럼, 신라 공주와 결혼한 사실은 부여장의 정치적 입지에 도움이 되었을 뿐 지장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둘째, 무왕 시대의 대외관계
 왕후가 신라인이라는 사실이 무왕의 대외관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검토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만약 영향을 주었다면, 기득권층이 무왕과 의자왕을 비판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무왕 편을 보면, 무왕의 대외전략은 중국과 동맹하여 고구려·신라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무왕은 특히 신라 견제에 주력했다. 이 점은 무왕 시대에 백제의 주적이 신라였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무왕 편에 따르면,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 횟수는 단 1회인 데 비해, 백제와 신라의 전쟁 횟수는 무려 14회나 된다. 42년간에 달하는 무왕의 집권기간 중에 고구려와의 전쟁은 무왕 8년에 1차례 있었을 뿐이다. 이런 점을 보면, 왕후가 신라인이라는 사실이 무왕을 친(親)신라적인 군주로 만들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의자왕에 대한 국내외 평가
 의자왕은 왕자 시절부터 국내외적으로 좋은 평판을 받았다. 의자왕은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한다는 이유로 당나라 사람들로부터 해동증자(海東曾子) 즉 ‘동방의 증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중국인들이 의자왕을 동방의 증자라고 격찬한 것은, 백제와 중국의 교류를 담당하는 백제 엘리트들이 의자왕을 좋게 선전해주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어머니가 신라인이라는 이유로 백제 안에서 찬밥 대우를 받았다면, 이런 일은 결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어려서부터 안정적인 지위를 갖고 있었기에 국내외적으로 좋은 평판을 받았으리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위와 같은 세 가지 증거를 굳이 제시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삼국사기>의 대표 편찬자인 김부식의 기술태도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유사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김부식은 백제 임금 특히 의자왕에 관해서는 상당히 악의적으로 기술했다. 그는 의자왕이 궁녀들과 술을 마신 일까지 세밀히 기록했다. 그다지 대수롭지도 않은 일을 시시콜콜하게 다 기록해놓은 것은 ‘백제는 어차피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의자왕이 어머니의 혈통 때문에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린 정황이 포착됐다면, 김부식은 어떻게든 그 점을 <삼국사기>에 기록하려 했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이 문제가 의자왕의 정통성에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서동요 설화와 관련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는 충남 부여시 궁남지. 

저작권자 © 주간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