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대군의 딸과 김종서의 아들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했다는 내용의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가 방송되고 있다. 서로 원수지간인 수양대군과 김종서의 자녀들이 사랑을 했다니, 줄리엣과 로미오의 슬픈 사랑을 연상케 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왕실과 사돈 맺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런 기회가 오면 덥석 물었겠지'라고 생각하면, 오판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그 같은 분위기를 증명할 만한 사료는 상당히 풍부하다.

 왕실의 혼인을 국혼(國婚)이라 했다. 국혼은 가례와 길례로 구분되었다. 가례(嘉禮)는 주상이나 왕세자의 결혼, 길례(吉禮)는 왕자나 왕녀(공주•옹주)의 결혼이다. 국혼은 왕실의 어른인 대비•왕대비•대왕대비의 허락으로부터 시작해서, 결혼준비위원회인 가례도감, 길례도감의 설치를 거쳐 금혼령과 간택 등의 절차를 거쳐 진행되었다. 금혼령과 동시에 전국적으로 발포된 것이 지원서 제출명령이었다. 지원서의 명칭은, 왕녀의 배우자를 뽑는 경우는 동자단자(童子單子, 총각 보고서)라 했고, 그 외의 경우는 처녀단자(처녀 보고서)라 했다.

 지원서 제출명령에 대한 당시의 반응을 보면, 조선시대 사람들이 왕실과 사돈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영광입니다!"하고 받아들이기보다는 "저희는 됐습니다!"라며 기피했다. 전국적으로 지원자를 모집했는데도 응모자가 극히 적었다는 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1837년 제24대 헌종(정조의 증손)의 국혼 때는 지원자가 전국적으로 12명이었다. 1882년 왕세자 이척(훗날의 순종)의 국혼 때는 지원자가 25명이었다. 또 제23대 순조(정조의 아들)의 딸인 명온공주의 부마를 선발하는 간택에는 총 17명이 지원했다. 이런 사례들에서 나타나듯이, 국혼 지원자는 대체로 20명 혹은 30명을 넘지 않았다.

  '양반들한테만 기회를 줬으니까 지원자가 적었겠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헌종 국혼 때의 사례를 보면, 지원 결격 사유는 ▲ 이씨 성을 가진 사람 ▲ 주상, 왕대비, 대왕대비와 일정한 친족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 ▲ 결손가정의 자녀 ▲ 중병을 앓는 부모를 둔 사람 등이었다. 천민이 아닌 이상, 이런 결격사유만 없으면 누구나 다 지원할 수 있었다.  그처럼 문호가 활짝 열려 있었는데도 지원자가 적었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에서 벗어난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왕실 홈페이지'가 다운될 정도로 신청이 폭주했을 것 같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런 기회 앞에서 의외로 냉랭했다. 국혼에 지원하라는 명령이 내려지면 일단 기피하고 보는 게 그들의 분위기였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사대부 가문들이 국혼을 기피하자 한성부(서울시청)에서는 점쟁이들까지 동원해서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점을 쳐서 처녀를 색출하도록 했다. 점쟁이까지 동원해 처녀를 색출해야 할 정도였으니, 국혼에 대한 민간의 거부감이 얼마나 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럼, 그들은 왜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거부한 것일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돈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상, 왕세자, 왕자의 배우자를 뽑는 경우에 지원자는 옷을 새로 맞춰야 했을 뿐만 아니라 몸종, 유모, 미용사에다가 가마까지 준비해야 했다. 이 정도면 웬만한 집안에서는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혜경궁 홍씨(사도세자의 부인)의 회고록인 <한중록>에 따르면, 홍씨가 국혼에 지원하는 바람에 언니의 혼수비용으로 모아둔 재물을 썼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 별도로 빚까지 졌다고 한다. 명문 양반가에게도 이처럼 부담스러운 일이었다면, 일반 서민들에게는 오죽했으랴. 합격하리란 보장도 없이 빚까지 내면서 거금을 들일 사람들이 몇이나 됐을까.

  둘째, 들러리가 되기 싫었기 때문이다. 최종 합격자를 미리 내정해 놓은 상태에서 형식적으로만 지원자를 공모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웬만한 지원자들은 들러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들러리를 서는 것도 아니고, 돈까지 들이면서 들러리를 서야 했으니, 어느 누가 좋아했겠는가.

 셋째, 위험했기 때문이다. 왕실의 사돈이 됐다가 집안이 풍비박산되는 경우가 흔했던지라, 웬만한 집안에서는 왕실과의 혼인을 죽음보다 더 싫어했다. 물론 왕실과의 혼인을 희망한 집안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가문들은 정치적 풍파로부터 자신들을 지킬 만한 힘이 있는 집안들이었다. 그러므로 임금의 배우자나 며느리가 되고 싶어 하고 임금의 사위가 되고 싶어 하는 드라마 속의 인물들은 조선시대 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대표하지 못한다. 그것은 극소수에 불과한 특권층 인물들의 정서를 대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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