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지배했다. 하지만, 고구려 기마군단의 활동범주는 이보다 훨씬 더 넓었다. 특히 광개토태왕(재위 391~412년)의 경우에는 내몽골초원 깊숙이 진출해서 군사적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 점을 입증하는 자료를 고구려인들은 수도인 국내성에 남겨 놓았다. 오늘날의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해당하는 국내성에 남아 있는 광개토태왕릉비(광개토대왕릉비)가 바로 그것이다. 비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영락 5년 을미년, 왕은 패려족(稗麗族)이 사람을 ……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몸소 (군대를) 이끌고 가서 징토하였다.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들의 3개 부락 600~700개 영(營)을 깨뜨렸으니, 소?말과 양떼는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다."(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稗麗不□□人, 躬率往討. 過富山負山, 至鹽水上, 破其三部洛六七百營, 牛馬群羊, 不可稱數.)

 영락 5년은 광개토태왕의 집권 5년째 되는 해로서, 서기로 치면 395년 2월 6일부터 396년 1월 26일까지다. 이 해에 스물두 살의 젊은 태왕은 유목민족인 패려족에 대한 징토를 단행했다. 패려족은 비려족 혹은 과려족이라고도 불리며, 흉노족의 일파로서 지금의 몽골 등지에서 활약했다. 그럼, 태왕이 패려족에 대한 징토를 결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은 "왕은 패려족(稗麗族)이 사람을 …… 하지 않았기 때문에" (王以稗麗不□□人) 라는 표현이다. 그런데 원문의 "□□"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가장 핵심적인 글자 2개가 지워졌기 때문에 비문 상으로는 태왕이 왜 그런 결단을 내렸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비문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고구려와 패려족이 이전에 어떤 관계였고 그들이 왜 전쟁상태에 돌입했는지를 추론할 수 있다.

  비문에서는 "패려족(稗麗族)이 사람을 …… 하지 않았기 때문에" 태왕이 징토를 결심했다고 했다. 패려족은 어떤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구려의 공격을 초래했다. 패려족의 작위(作爲)가 아니라 부작위(不作爲)가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대체 패려족은 무슨 일을 하지 않은 걸까? 현재로서는 패려족이 고구려의 신하국이었고,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내 상국 임금을 알현해야 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 광개토태왕이 군사행동을 결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론할 수 있다.  패려족에 대한 응징을 결심한 광개토태왕은 꽤 과감한 방식으로 군사행동을 단행했다. 패려족과의 국경지역을 공격해서 이를 점령하는 방식을 취한 게 아니라 패려족 영토의 깊숙이까지 밀고 들어가면서 쭉 훑고 나오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군사적 자신감이 없었다면 쉽게 선택할 수 없는 방식이다. 점령이 아니라 응징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이런 방식을 취한 것이다.

  비문에 따르면, 태왕의 원정군은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거쳐 염수(鹽水)까지 밀고 들어가서 3개 부락의 600~700개 영(營)을 격파한 뒤에 수많은 소, 말, 양떼를 빼앗았다. 패려족 영역 내부를 뚫고 지나가면서 부락을 파괴하고 가축을 빼앗은 것은, 그들의 경제를 마비시킴으로써 고구려에 대한 복종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목지대에 가서 가축을 빼앗는 것은, 수확기에 농경지대에 가서 벼를 몽땅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오늘날로 치면 전투기 편대를 동원해서 적국의 산업시설을 집중 타격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고구려에 복종하지 않으면 먹고 살 길을 끊어버리겠다는 강력한 의사표시였던 것이다.

 위와 같이 광개토태왕은 만주나 한반도 북부에만 영향력을 행사한 게 아니라 내몽골초원의 서부에까지 깊숙이 침투하여 고구려의 '파워'를 과시했다. 물론 그 지역을 항구적으로 지배한 것은 아니지만, 고구려 기마군단이 초원을 가로질러 타격을 가한 뒤 유유히 돌아왔다는 것은 당시의 고구려인들이 하늘을 찌를 듯한 '오만함'에 넘쳐 세상 그 무엇도 무서울 게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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