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최대의 정복군주, 담덕. 예전엔 그를 '광개토대왕'이라 불렀지만, 요즘엔 '광개토태왕'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다. 2007년 MBC에서 방영된 <태왕사신기>나 지난 4일부터 KBS1에서 방송되고 있는 <광개토태왕>이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최근 발표되는 학계 논문들에서도 '광개토태왕'이란 표현이 적지 않게 사용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두고 '대중의 국수주의에 영합하기 위한 역사 포퓰리즘'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한국 고대사를 배경으로 한 사극들에서 '태왕' 뿐만 아니라 '제국'이나 '황제' 같은 표현이 자주 사용되는 것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시각은 지금껏 우리의 역사의식이 <삼국사기>에만 지나치게 의존한 탓이다. 이 책에서는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최고통치자의 칭호가 '왕'으로 통일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는 '왕'이란 표현만 나오지만, '태왕' 칭호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사료는 충분한 편이다.

  '광개토왕릉비문'에서는 고구려 군주 담덕을 태왕이라 불렀다. 여기서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나 영락태왕(永樂太王) 등의 표현이 등장한다. 이 비석은 <삼국사기>보다 731년 전인 414년에 제작되었다.

  경북 경주시의 노서리 고분군(古墳群)에 있는 신라 때 무덤인 호우총에서도 담덕을 태왕이라 부른 유물이 발견되었다. 415년에 제작된 그릇에 이 칭호가 새겨져 있다. 고구려에서 만든 그릇이 양국의 교류에 힘입어 신라인의 무덤에까지 들어갔던 것이다.  1935년 중국 길림성 집안현(지린성 지안현)에서 발견된 모두루 무덤. 이 무덤의 주인공 모두루는 담덕의 재위기간에 생존했던 인물이다. 이 무덤에서 발견된 비석의 글귀 즉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에서는 담덕 뿐만 아니라 담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을 태왕이라 불렀다.

 423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북 충주시의 '중원고구려비'에서는 장수왕을 태왕이라 불렀다. 경주시 노서리 고분군에 있는 또 다른 무덤인 서봉총에서도 장수왕을 태왕이라 지칭하는 그릇이 출토되었다.  이런 태왕 칭호를 두고 "그것은 고구려 군주의 정식 칭호가 아니라 사후에 부여한 미칭(美稱)이나 시호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장수왕 재위 당시에 제작된 '중원고구려비'에서 그를 태왕이라 부른 것을 보면, 태왕이란 표현이 재위 중의 고구려 군주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광개토왕릉비문'에 담긴 '영락태왕'이란 표현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영락(永樂)은 담덕 재위 당시의 연호였다. 군주가 죽은 뒤에는 조(祖)나 종(宗) 같은 묘호로써 군주를 부르지만, 살아 있을 때는 왕이나 황제 같은 칭호 앞에 연호를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예컨대, 청나라의 대표적 군주인 애신각라홍력(愛新覺羅弘曆)은 생전에는 건륭(乾隆)이라는 연호를 따서 건륭제라 불렸지만 죽어서는 고종(高宗)이란 묘호로 불렸다.

 이런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영락태왕이란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재위 중인 고구려 군주가 태왕이라 불렸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담덕의 경우에는 생전에는 '영락태왕'으로, 사후에는 '광개토태왕'으로 불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태왕이란 칭호가 생전과 사후의 고구려 군주를 가리키는 정식 칭호였음을 알 수 있다.   '태왕이라 부르든 대왕이라 부르든 아니면 그냥 왕이라 부르든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물론 대왕이나 왕으로 부른다 하여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태왕 표현이 있었다는 사실을 숨길 경우, 왕 밑에 왕을 둔 고구려의 정치구조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대주류왕은 백성 1만여 명을 이끌고 투항해온 동부여 대소왕의 친족을 왕으로 책봉했다. 이는 고구려왕이 자기 밑에 또 다른 왕을 두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왕 밑에 왕이 있는 논리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대주류왕 이후의 어느 시점부터 태왕이란 표현을 사용했으리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통치구조가 사실상 황제국과 다를 바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 군주의 칭호를 원칙상 '왕'으로 통일하다 보니, 이 같은 황제국 시스템이 묻혀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담덕의 정식 칭호가 '광개토대왕'이 아니라 '광개토태왕'이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고구려의 정치구조가 우리가 알고 있는 왕국 시스템이 아니라 실제로는 황제국 시스템이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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