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의 영원한 로망, 고구려 광개토태왕(광개토대왕).광개토태왕은 두말하면 잔소리일 정도로 매우 친숙한 '국민영웅'이지만, 서기 10세기의 의미를 곰곰이 음미해보면 그가 얼마나 특출한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다.

  10세기는 광개토태왕이 사망한 때로부터 5세기 뒤이고 고구려가 멸망한 때로부터 3세기 뒤이지만, 그것이 갖는 의미를 탐구하다 보면 우리는 한민족이 그를 만난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이해할 수 있다. 고구려가 강성했던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10세기의 의미를 음미하다 보면 그것이 실은 '뜻밖의 기적'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고대 중국 문명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15개 국가의 수도였던 낙양(뤄양). 이 낙양을 축으로 할 때,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9세기까지(편의상 'A 시기')는 9시~12시 방향에 있는 나라들이 중국과 더불어 패권 대결을 펼쳤다. 흉노족, 선비족, 돌궐족, 위구르족 등의 활약은 이런 구도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기원전 3세기 이전만 해도 중국에서는 동아시아를 호령할 만한 강대국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 시기의 중국은 명백히 '약골'이었다.

  A 시기의 상당 기간 동안에는 한민족이 만주를 지배했지만, 이 시기에는 힘의 중심이 9시~12시에 있었기 때문에 한민족이 아시아를 호령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이런 핸디캡을 극복하고 한민족의 영광을 일구어낸 인물이 바로 광개토태왕이다. 이 시기의 한민족은 광개토태왕이라는 걸출한 인물의 등장에 힘입어 250년 동안 아시아 패권질서를 교란시킬 수 있었다.

 아시아 패권질서를 교란시켰다는 것은, 9시~12시 국가들이 중국과 더불어 패권경쟁을 벌이는 구도 속에서, 경제적, 지리적으로 불리한 고구려가 광개토태왕의 활약에 힘입어 아시아 패권구도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의미한다. 정확히 말하면, 당시 고구려의 국력은 동아시아에서는 2위 정도, 아시아에서는 3위 정도였다. 고구려가 패권질서를 교란시킴에 따라 광개토태왕 이후의 250년 동안에는 9시~12시 방향과 0시~3시 방향이 동시에 중국을 괴롭히는 예외적인 구도가 출현했다. 1000년이 훨씬 넘는 A 시기 전체를 놓고 보면, 이 250년은 '예외'에 해당하는 짧은 시간이었다.

 기원전 3세기 이전의 중국은 세계 최대의 무역로인 초원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 데다가 강력한 통일왕조가 없었던 탓에 기본적으로 약체 국가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가 남쪽과 서쪽에는 장성(만리장성)을 쌓지 않으면서도 북쪽과 동북쪽을 향해서만 장성을 쌓은 것은, 그 이전만 해도 동북쪽의 한민족이 중국을 못살게 굴었음을 증명하는 유력한 증거들 가운데 하나다.

 광개토태왕이 광활한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당시의 중국이 5호 16국 시대였다는 점에 있다. 5호(胡) 즉 다섯 유목민족이 북중국에 난입해 16개 왕조를 세움에 따라 중국의 원심력이 약해진 시대였기 때문에 그가 좀더 쉽게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9시~12시 국가들이나 중국에 비해 낙후된 경제력을 갖고도 짧은 시간 내에 대대적인 영토확장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광개토태왕의 리더십이 그만큼 출중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광개토태왕 시대는 9시~12시 방향이 강성한 시대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경우라면 0시~3시 방향의 고구려로서는 힘을 쓰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의 등장으로 인해 약 250년 동안 한민족은 아시아의 강자로 활약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당시의 고구려는 남(9시~12시 국가들)의 시대에 나의 발전을 이룩했던 것이다.
  핸디캡을 핸디캡으로 여기지 않고 핸디캡에 자극을 받아 한층 더 맹렬히 질주하는 도전정신. 그런 도전정신이 원동력이 되었기에 광개토태왕의 고구려는 남의 시대에 나의 발전을 구가하는 행운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민족이 광개토태왕을 만난 것은 대단한 행운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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