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후기의 명장’하면 흔히 을지문덕과 양만춘을 떠올린다. 이들은 통일 단계에 접어든 거대 중국에 맞서 황혼기의 고구려를 지켜낸 명장들이다. 을지문덕은 살수대첩에서 수나라 군대를, 양만춘은 안시성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를 막아냈다.

 그런데 고구려 후기의 명장 계보는 온달 장군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거룩한 계보’는 온달-을지문덕-양만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온달 역시 통일 단계에 접어든 거대 중국으로부터 고구려를 지켜낸 명장이기 때문이다.
온달의 역사적 의의를 설명하기에 앞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그가 왜‘바보’라고 불렸는가 하는 점이다.
‘바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사람을 놓고 아무리 열심히 역사적 의의를 설명해봤자, 듣는 이들은 ‘바보가 정말 그랬을까?’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온달은 왜 바보라고 불렸을까’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온달이‘바보’라고 불린 이유는‘이것’ 때문이었다.‘바보 노무현’이란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보’라는 수식어가 반드시 지적 능력의 결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보 노무현’이 실제 바보가 아니듯이 ‘바보 온달’ 역시 실제 바보가 아니었다. 물론‘바보 노무현’의 바보와‘바보 온달’의 바보가 똑같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보 노무현’에서‘바보’는 참혹한 실패가 뻔히 예상되는데도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바보 온달’의 ‘바보’에는 그런 의미가 없다. 여기에는 다른 의미가 있다. <삼국사기>‘온달열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때 사람이다. 얼굴은 웃음이 나도록 못생겼지만 마음씨는 고왔다. 집이 무척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고, 해진 저고리에 헐어빠진 신발로 시내를 왕래하니 사람들이 보고는 바보 온달이라 불렀다.”

 온달이 바보라고 불린 이유는 겉모습 때문이었다. 그는 한없이 착해 보이면서도 웃음이 날 정도로 못생긴 사람이었다. 착해 보이면서 못생긴 사람은 경우에 따라 바보처럼 비칠 수도 있다. 그런 외모에다 남루한 옷차림으로 동냥까지 하고 다녔으니, 더욱 더 바보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보 같은 겉모습 때문에 온달은 평강왕에게까지 알려질 정도로 대단한 유명인사가 되었다. 우리 시대의 바보 아이콘인 영구나 맹구 이상으로 6세기 후반의 고구려에서는 온달이 바보의 대명사였다.

 이런 유명세가 원인이 되어 훗날 평강공주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 온달에게 갈래!”라며 왕궁을 뛰쳐나갔던 것이다. 참고로, ‘평강공주’의 ‘평강’은 공주의 이름이 아니라 그 아버지의 이름이다. 사료에 공주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므로 ‘평강왕의 공주’라는 의미에서 편의상 평강공주라 불렀던 것이다.
온달의 정신능력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점은, 평강공주를 처음 만났을 때의 광경에서도 쉽게 드러난다. 느닷없이 자신을 찾아온,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공주의 존재 앞에서 온달은 지극히 ‘이성적’인 반응을 보였다.

 공주를 자처하는 아가씨의 황당한 프러포즈 앞에서, 온달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한 게 아니라 버럭 화부터 냈다. “이건 젊은 여자 분이 하실 행동이 아니죠, 댁은 사람이 아니라 필시 여우나 귀신이에요, 날 괴롭히지 마세요.”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갔다. 온달이 지극히 정상적일 뿐만 아니라 꽤 이성적인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온달은 딱 한 번만 거절했을 뿐, 더 이상 거절하지는 않았다.
온달이 모자라기는 커녕 웬만한 사람보다 출중했다는 점은, 무과시험 역할을 겸한 전국사냥대회에서 그가 1등을 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고려나 조선 같은 문인사회에서는 우수한 인재들이 문과시험으로 몰리지만, 고구려 같은 무인사회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무과 시험으로 몰리게 된다. 따라서 무인사회의 무사는 문인사회의 선비에 비견되는 것이다. 사실, 무인사회의 무관은 문인사회의 무관보다 지적 능력이나 전투력이 훨씬 더 월등한 법이다.
고구려판‘슈퍼스타K’인 전국사냥대회에서 1등을 한 사실은 온달이 단순히 짐승만 잘 잡았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무인사회의 엘리트가 되는 데 필요한 지적 능력과 전투력을 갖추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무리 공주가 재정적 후원을 했다 할지라도 온달 자신이 우수한 인재가 아니었다면 고구려 같은 대제국에서 전국 1등을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다음주에 계속>

사진설명
서울 광진구 아차산에 있는 온달과 평강공주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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